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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서한

[팬픽션] 푸른 강가 누우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1

중국 花楚님의 한 무제 시기 배경 팬픽션입니다. 한 무제 유철과 위청, 위태자 유거와 곽광 간에 약간의 커플링 요소가 있으며 곽거병도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총 5편으로 번역은 천천히 진행할 예정입니다.


위와 같이 쓰신 분께 번역 게재를 허락받았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 올리실 때는 위의 요청대로 글쓴이 이름과 출처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자 : 花楚
원문 : http://linegoe.lofter.com/post/2d359d_548cc5a

제목은 두보의 추흥秋興 8수 중 5수의 한 구절입니다.










이른 새벽, 궁인들이 맑은 물로 선실宣室 계단 아래의 핏자국을 닦아내고 있었다.

황제는 간밤의 악몽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내시를 참하라는 영을 내렸다. 그가 액운을 갖고 왔다는 것이다.

폐하는 미쳤어. 곽광은 조정의 대신들과 내조 궁시들의 얼굴에서 점점 또렷해지는 그 문장을 읽어낼 수 있었다.

곽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누군가 그에게 경고했었다. 결코 폐하가 그릇되었다고 여기지 마라. 설령 혼자 마음으로만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그것은 참람된 일이며 대불경이다.

그래서 곽광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수그리고 어깨를 움츠린 채 빠른 걸음으로 전각에 들었다. 공경하고 삼가는 태도로 절을 올리는 동안에도 시선은 시종 바닥에 깔린 푸른 돌들의 틈새에 굳어 있었다.

폐하, 사자궁이 완공되었습니다.

팔팔하게 살아 있던 아들딸과 핏줄들을 죽이고는 차갑게 얼어붙은 궁실과 누대를 세운다. 미치광이가 아니면 무엇인가.

아아. 황제의 대답은 무심했다. 어린 황자가 무릎께에 앉아 있었다. 간밤의 꿈 때문에 사람을 죽인 노쇠한 군주는, 지금은 평안하고 자애로워 보였다. 늙고 어린 두 사람은 부자라기보다 오히려 조부와 손자 같았고 심지어는 증조부와 증손자 같기도 했다.

폐하의 영명과 지혜를 우리 같은 범인들은 따라가기 어렵다. 그러나 신자 된 이는 설령 칼날의 숲과 불길의 바다라도 그저 받들고 따라야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말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어리석고 나약한 충정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냉담한 거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사람의 평생을 통틀어 가장 고명한 계략이었다.

그 사람은 평생의 순종과 맞바꾸어 대한에 맞설 적수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했다. 앞으로 다시는 흉노에게 군을 보내자며 거창한 소리를 늘어놓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제 선실에는 그저 어린 황자가 옹알거리며 책을 외는 소리 뿐이다.





그는 말했었다. 부황께서는 내가 책 읽는 것을 싫어하시는 게 아니다. 내 성격이 온화하다고 나를 버리신 것도 아니고. 사실은 나를 조금 좋아하기도 하시고, 어머니에게도 옛 정이 남아 있으시지. 부황은 그저 싫어할 무언가가 필요하신 거야.

양석공주가 막 처형됐을 무렵이었다. 부자의 반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애매모호했던 곽씨와 위씨 두 집안의 관계는 표기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점차 엷어져서, 진작 서로 상관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곽광은 확실한 기회를 잡아 몰래 그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정실靜室에 마주앉았다. 어둡고 으슥한 밤이었다. 곽광은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결정을 내리기만 한다면 주저 없이 따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부황은 한 번도 군을 이끌고 적을 죽인 적이 없으시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사셨다. 그 분은 적을 필요로 하셔. 흉노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고, 전각 아래의 나무 한 그루일 수도, 창 밖의 바람 한 줄기일 수도, 그 분의 아들일 수도 있겠지.

그는 아주 잠시 멈칫했다. 아광, 나는 그렇게 변하고 싶지 않다.

곽광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숙여 절을 올렸다. 옷깃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촛불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그림자도 그에 따라 요동쳤다. 다음날 아침, 곽광은 황제의 어가를 수행해 감천궁으로 향했다.





오늘은 작은 일이 있었다. 김일제가 제 장자를 직접 죽였다. 소식을 들은 폐하는 두 번이나 울었다.

나의 농아弄兒, 농아야.

몹시 듣기 거슬리는 울음소리였다. 아랫사람들이 극력 위로하는 동안 김일제는 당 아래 무릎 꿇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손에는 아직 관을 올리지 않았던 장자의 긴 머리채를 쥐고 있었다. 목 아래로 잘려 나간 머리통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땅 위로 늘어졌다. 마치 줄곧 허공에 매달린 양 안식을 얻지 못했던 그 아비의 마음과 같았다.

김일제가 베어 죽인 것은 그의 반평생을 맴돌았던 욕된 이름이었다.

농아, 농아.

곽광과 김일제는 같은 해에 태어나 역시 같은 때에 장안으로 오게 되었다. 원수 2년 하서에서 대승을 거둔 곽거병은 휴도왕의 아들을 사로잡았고, 금으로 만든 사람으로 하늘에 제를 바쳤으며, 하동에서 아버지를 만나 절을 올렸고, 아우 광을 서쪽 장안으로 데려왔다.

그들 둘은 표기장군의 소소한 전리품이었다. 밖으로는 공훈을 쌓고, 안으로는 덕업을 쌓는.

곽씨 집안 사람들은 표기장군이 생부를 찾는다는 말에 진작부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곽거병이 왜 굳이 곽광만 데려가겠다고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혹은 곽거병 자신 역시 잘 모르고, 그저 재미있어서,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이어린 적자를 바라보는 곽중유의 눈은 공황과 근심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세속적인 효도였고 무정한 복수이기도 했으나, 그는 거스를 수 없었다. 곽광 역시 아버지의 기이한 절망을 느꼈다. 그는 장안에 도착하면 꼭 언행을 삼가 가문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곽중유는 그저 하릴없이 웃으며 그에게 몸조심하라고 말했다.

가는 길은 몹시 힘들었다.

곽거병은 말이 많지 않았고, 곽광 역시 유순하게 침묵을 지켰다. 돌아가는 길 위에서 형제들은 채 열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마지막 즈음에는 하루 종일 대화가 없었다. 장안에 도착하자 군대는 성 밖에 진영을 꾸렸다. 곽거병은 곽광을 데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입성했다. 그는 대문이 높이 솟은 저택을 가리키며 여기가 곽부霍府라고 말했으나, 들어가지는 않고 그대로 지나쳐서 곧장 대장군부로 향했다. 여기는 삼촌네 집이야.

문턱에 앉아 졸던 문지기가 말굽 소리에 깨어나서는 신이 나서 내다보며 헤헤 웃었다. 곽 도련님 다녀오셨습니까요.

다녀왔다고?

곽거병은 문지기의 인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섰다. 포의에 간소한 관을 쓴 사내가 책상다리로 상 앞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때마침 대나무 젓가락으로 집어 올렸던 반찬이 떨어지자 그는 고개를 돌려 눈길을 주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투항을 받아 오라고 보냈더니 검고 흰 것을 가리지 않고 다 죽여 버렸다고. 참 대단한 표기장군이시다.

곽거병은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비로소 뒤에 서 있던 곽광이 드러났다.

그건 누구냐. 남자는 밥그릇을 내려 놓고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으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본래 어른들은 어린아이에게 무른 법이었다. 게다가 곽광은 제법 남에게 귀여움 받을 만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삼촌, 제 아우예요. 곽거병은 사면 조서라도 되는 것마냥 그를 끌어당겨 앞으로 내세웠다.

곽광은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그는 놀라고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낮게 불렀다. 형님.

네가 아광이구나. 남자는 일어서더니 곽광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병이 너를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서신을 보냈었단다.

곽광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단정히 절을 올렸다. 소인 곽광, 대장군을 뵙습니다.

아이고. 일어나거라, 얘야. 집안에서 무어 그리 격식을 차려. 위청은 곽광을 부축해 일으키며 꼼꼼하게 살폈다. 치켜올라간 눈과 입꼬리는 보기 좋게 웃고 있어 봄날의 햇살 같았다. 아버님은 안녕하시고? 예전…… 옛날 평양부에 있을 때 중유 형의 은덕을 많이 입었는데, 근래 들어서는 왕래가 소홀했구나.

예의를 차린 언사였으나 정감 있게 들리지는 않았다. 곽광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예 예 하고 주억거렸다. 그는 아버지가 위청에 대해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는 위청 역시 곽중유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아마 은덕만 입지는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떠들기만 할 게 아니지. 자, 이리 앉아서 같이 밥 먹자. 위청은 곽광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는 직접 그릇 가득히 밥을 퍼서 건네고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계속 그러고 있지 말고 밥 먹어라.

대장군, 감사합니다. 곽거병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튀어오르듯 즉각 일어났다. 곽광은 그 날 곽거병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을 끝내 잊지 못했다. 그것은 먼 길을 떠돌던 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의 가뿐함이었다.





곽거병은 오만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부유하고 귀하게 자라 입고 먹고 쓰는 바가 모두 평범한 사람은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으며 안목과 식견도 일반과 동떨어져 있었으나,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맞춰 주기에만 바빴다. 처음에는 그가 황후와 대장군의 외조카인 까닭이었고, 나중에는 그가 표기장군이 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찮은 겉치레로 똑같이 남들에게 보답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늘상 멀리 떨어져 침묵했던 것이다.

그 해에는 겨울 사냥이 있었다. 대오가 가던 길을 멈추고 쉬는 동안 폐하는 참승驂乘으로 온 대장군과 함께 길가의 작은 정자에서 바둑을 두었다. 선두에 있던 표기장군은 진작부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대장군은 몸이 좋지 않아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그가 멈추기만 하면 군사들은 화로의 불길을 키워야 했다. 정자 지붕에 쌓인 눈이 열기에 녹아 기왓골을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릴 정도였다.

두 사람의 바둑은 승부가 나는 법이 거의 없었고 주 목적은 한담이었다. 그럴 때면 무엇을 이야기하건 표기장군에게로 화제가 귀결되곤 했다. 대화는 온화했고 흔연했으며 미래에 대한 끝없는 기대로 가득차 있었다.

짐이 거병더러 가자고 했을 때는 얼굴 가득 싫은 기색이던데, 막상 오니 제일 서두르는군.

좀 서두르는 것 같기는 합니다. 대장군이 답했다.

황제는 눈을 들어 대장군을 보았으나, 대장군은 오히려 시선을 내리깔고 말없이 바둑알을 판에 내려 놓았다.

옛날 중경仲卿이 거병에게 승마를 가르치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창피해서 아무도 못 보게 하고는 자네를 앞세우고 그 아이가 뒤를 쫓던 모습 말이다. 작은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제가 이미 다 따라잡은 줄도 모르고 있는 힘껏 앞으로 달려가 버렸더랬지. 아무리 불러도 듣지 않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혼자 남지 않았겠나.

황제의 말에는 은근히 다른 뜻이 있었다. 그러나 대장군은 밝게 웃을 뿐이었다.

따라잡는다면 좋은 일입니다. 누구나 뒤에 오는 파도가 앞의 것보다 높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이렇듯 집안일인 양 오가는 한담을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곽광은 위씨와 곽씨 두 집안의 사람이었던 까닭에 폐하와 대장군께 술을 따라 드리기 위해 남아서 시중드는 것을 허락받았다.

폐하의 금 술잔은 가득 채워야 했다. 그러나 대장군의 동 술잔이 반쯤 찼을 때 곽광은 살며시 주전자를 거두었다. 위청은 전혀 마음 두는 것 같지 않았으나 황제가 먼저 손을 뻗어 막았다.

많이 따르지 마라. 술기운이 오르면 밤에 또 기침을 할지도 모르니. 네 삼촌의 가슴앓이가 나아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 한실의 대장군이 비실이라고 웃지 않겠느냐.

황제의 말은 나이 어린 곽광이 듣기에도 몹시 귀에 거슬리는 데가 있었다. 마치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위청을 다치게 만들 거라는 듯했다. 그러나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위청 역시 끊임없이 참으며 물러나고 있을 터였다.

바둑을 두는 것과 같았다. 승패가 정해진 뒤에도 돌을 거두고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결코 다하는 일 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바둑. 한 판, 또 한 판, 위청은 시시각각 불안하게 흔들리는 황제의 마음을 어르고 있었던 것이다.

술을 건 내기 바둑이었다. 가득찬 잔과 반만 찬 잔. 두 사람은 각자의 술잔을 들고 단번에 비웠다.





곽광은 곽거병처럼 낭거서狼居胥에서 봉선을 올리지도 못했고, 위항 형제처럼 강보에 싸여 있던 무렵부터 후로 봉해진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위씨 가문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위씨 집안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여 준 것은 대체로 곽거병에게 효성이라는 광채를 더해 주기 위해서였으나, 그와 유거의 나이가 엇비슷했던 까닭도 있었다.

이를 통해 위씨와 곽씨 집안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혹은 그 정도 높이까지 올라가면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건 없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것은 곽거병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싶어서였는지 혹은 어쩔 수 없어서였는지, 위청은 곽광을 이끌며 많은 것을 가르쳤다. 심지어 자신의 세 명 친아들보다도 더했다. 기실은 그들 역시 유거와 비슷한 나이에 핏줄이 이어진 이종사촌이기까지 했는데 그처럼 이유도 없이 바깥사람을 싸고 도니 위항 형제들은 자연히 불만을 품었다. 이것은 곧장 웃지도 울지도 못할 말썽으로 이어졌다.

한 번은 정도가 지나쳐, 위항이 새총을 쏘아 곽광의 머리에 엄지손가락만 한 상처를 내서 선혈이 땅바닥까지 흘렀다. 낭중郎中이 방에서 곽광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세 아들은 정원에 꿇어 앉아 채찍과 회초리를 손에 들고 저희를 혼내 달라고 울며불며 청했다. 문간을 몇 번인가 오락가락하던 위청은 결국 기력이 떨어졌다. 그는 기둥에 기대어 돌계단에 앉아서는 세 아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미 제후고, 앞으로 제 분수만 잘 지키면 한없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게다. 아광은 다르잖느냐. 거병이 앞으로 아무리 큰 공을 세워서 처자에게 은택이 미친다 해도 그 아우가 제후로 봉해지지는 않는다. 그 아이는 제 앞길을 혼자 헤쳐 나가야 해.

장막 안에서 천 리를 내다보며 적을 헤아려 승기를 잡는 대장군은 제 일족의 운명 역시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씨 가문의 영예는 이미 절정에 달했다. 지극히 성한 뒤에는 쇠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곽씨 가문에는 아직 더 나아갈 여지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