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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서한

[팬픽션] 푸른 강가 누우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2

저자 : 花楚
원문 : http://linegoe.lofter.com/post/2d359d_8447ac1









곽광이 장안으로 온 해에 궁의 왕 부인이 죽었다.

여러 꽃 중에도 단연 돋보이는 아름다움으로 한때 총애가 극에 달했던 여자였으나, 정해진 운명은 이겨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둘째 아들 유굉을 낳아 준 지 두 해도 못 되어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스무 살도 되기 전이었다.

그렇게나 박복한 명이었으니 낳은 아이도 오래 살지는 못할 터였다.

그 무렵 위씨와 곽씨 두 집안의 노복들 사이에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개운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왕씨 집안에 보낼 부의가 새로운 골칫거리였다. 이런 일이 터진 뒤에는 많이 보내는 것도 적게 보내는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 터졌다는 것인지 당시의 곽광은 알지 못했다. 감히 그에게 상세히 말해 주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 때 곽광은 위부衛府 동쪽 구석의 뒤뜰 별채에 살고 있었다. 본래 위온이 살던 곳이었다. 아이들을 아끼던 노인은 위부가 지어진 뒤 위광과 위보, 곽거병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곳에 살았다. 위씨 형제들이 저마다 혼인하여 부를 받아 나갔을 때는 노인도 죽고 없었다. 홀로 남아 머물러 있던 곽거병이 이제 곽광까지 데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텅텅 빈 장군부는 남에게 준 것처럼 되었다.

그 날 곽거병이 뜰에 서서 강궁을 당기고 있는데 곽부의 집사가 달려와 왕 부인의 죽음을 알렸다. 유굉 때문에라도 조정 신료들이 왕씨 집안에 이것저것 보내고 있으며, 부의는 다 준비해 두었고, 곽거병이 직접 갖다 줄 필요도 없으나, 조문 서신만은 몇 줄이든 친필로 써 주시라, 정 안 되면 남이 쓴 것에 도장이라도 찍어 주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곽거병은 성질을 부렸다. 부의 품목을 보고 또 보던 그는 즉각 너무 적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지난 하서대첩의 승리 후 폐하로부터 하사받은 만 금을 반 갈라 왕씨 집안에 갖다 주라고 명했다.

얼마쯤 지난 후 입조했던 위청이 돌아왔다. 위청은 길을 질러 곧장 동쪽 별채로 들어섰다. 본래도 들판에서 풍찬노숙하며 햇볕에 그을려 검게 탔던 얼굴빛인데 지금은 검다 못해 푸르게 변해 있었다. 그는 손에 들었던 말채찍을 그대로 들어 곽거병을 후려쳤다.

가을도 반쯤 흘러간 계절이었지만 곽거병은 활을 쏘느라 웃통을 벗고 있었다. 그는 내리꽂히는 채찍을 피하려 했으나 결국은 등에 엉망진창으로 검붉은 자욱이 남았다. 피가 흘러내려 예전 전장에서 생겼던 상흔들 사이로 뒤섞였다.

삼촌, 무슨 짓이에요!

몇 년을 안 맞더니 아주 집안 법도는 안중에도 없구나.

위청은 위항 형제도 때리곤 했었다. 대나무 회초리로 때리면 아이들은 하늘이 무너져라 울어젖혔고, 그러면 곧장 와서 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말리고 달래서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을 곽광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히 와서 막을 사람도 없다. 그저 놀라다 못해 혼이 나가 버린 곽광 한 사람만이 남아 서 있을 뿐이었다.

대장군이 표기장군을 때리다니.

삼촌이 보냈으니 나도 보낸 거라고요. 앞으로 감히 헛소리하는 놈이 없도록!

네가 잘 싸우는 것을 믿고 멋대로 굴지 마라. 조정이 너를 필요로 하는 동안은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할 테지. 허나 싸우지도 죽이지도 못하게 되었을 때는 어쩔 셈이냐?

그렇게 된다 해도 나는 대장군의 외조카요, 대한의 표기장군인데 누가 감히 어쩐단 말입니까?

곽거병이 태어난 다음 해에 위자부가 입궁했다. 그는 기억이 있을 무렵부터 장안성 위부의 작은 도련님이었으며, 나라가 집이고 집이 나라였다. 곽거병은 스무 살 때 이미 위청이 서른 살에 이뤘던 만큼의 공적을 세웠다. 자연스레, 그는 자신의 앞길이 위청처럼 순조롭고 심지어는 위청보다 더욱 찬란히 빛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곽광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시절을 돌이킬 때마다 곽거병이 한창 때의 젊은 나이로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성격으로 필경 곱게는 죽지 못했으리라. 허나 다른 생각도 들었다. 만일 대장군이 있었다면 정화 연간의 비통하고 처참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황제의 광증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물리치고 집착적으로 봉래를 향해 달렸다. 바다의 선인을 만나려는 것이었다. 늙어 시든 황제는 질질 끌리는 다리와 구부정히 휜 등으로 술사를 따라 춤추며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나 하늘이 내린 답은 미친 듯한 풍랑이었다.

그가 도대체 무엇을 갈구하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두 눈은 착란과 고집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조금만 더 있으면 풍랑에도 아랑곳없이 누선에 올라 신선의 산을 찾아낼 것만 같았다.

관중에 메뚜기 떼가 창궐한다는 소식이 그의 얼굴에 예전의 과단성을 아주 잠깐 돌려 놓았다.

창고를 열고 구휼할 쌀을 풀어라. 어서!

그는 팔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늙고 지친 손은 말을 듣지 않아 떨리고 있었다.

곽광이 처음으로 창고의 쌀을 본 것은 원수 삼년의 일로, 그 해는 전쟁 없이 평온했던 해였다. 하나는 지난해의 하서대첩에서 휴도왕이 항복하여 북쪽 국경이 미증유의 안녕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산동에 큰물이 져서 비옥한 밭이 모두 잠겨 군량을 댈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별 수 없이 십칠만이 넘는 산동의 이재민을 신태중으로 옮기고, 그들에게 삼 년 치의 양식을 주기로 했다. 구휼 광경을 구경하는 것은 장안성 사람들의 새 오락거리가 되었다. 세류창細柳倉이 열리고 제방에서 터져 나온 물처럼 좁쌀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나귀와 소가 끄는 수레에 실린 식량의 행렬이 십 리를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넝마 같은 옷에 비루먹은 몰골의 이재민들은 군대에 쫓겨 가며 무리를 이루어 성 밖을 걸었다. 그들은 해자를 끼고 자리한 자신들의 장엄하고 웅대한 수도를 멀리서 바라다 보며 황량한 새 터전을 향해 끝없이 나아갔다.

재해가 너무도 심하여 말을 먹일 낙구창洛口倉의 밀기울과 콩마저 구휼 식량으로 쓰였다.

위청은 탄식했으나, 그의 아들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웃었다. 거짓말, 사람이 어떻게 말이 먹는 걸 먹어요?

너희는 모를 게다. 말먹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나은 편이지. 아광, 평양에서 질경이 같은 풀을 봤지? 가을 즈음이 되어도 녹색으로 윤기가 도는데, 잎은 온통 가시투성이라 먹으면 아주 쓰고 떫은 데다 혀를 다 찔러 놓는단다. 허나 기근이 도는 해에는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지.

수 년을 전장에서 싸웠으나 위청의 말씨에는 아직도 옅은 하동 사투리가 남아 있었다. 도필리의 집안에서 자란 곽광이 말먹이풀의 맛을 알 리 만무했다. 그는 모호하게 대답하고는 밥만 깨작거렸다.

밥에 대해 위청은 거의 이상하기까지 한 경외를 품고 있었다. 곽거병이 외조모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슬그머니 곽광에게 전해 준 것에 따르면, 위청은 대여섯 살 무렵부터 양을 치라고 내몰렸는데 정계가 몰래 개떡 반 조각을 떼어 주곤 했다는 것이었다. 열두어 살이 되도록, 하루에 개떡 반 개였다.

위씨 집안의 아이들은 바깥에서 연회에 참석할 때면 격식을 차릴 줄 알았고, 집안에서 밥을 먹을 때면 많이 달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난 그릇과 탁자 위에 쌀알 한 톨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고기는 오히려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늘의 기러기든 땅의 이리든 잡아서 구워 익히면 다 먹을 것이 된다고 위청은 말했다.





봉래에서 흥이 깨진 늙은 황제는 장안으로 돌아오는 내내 화를 냈다.

돌아오던 길의 어느 날 밤, 곽광은 갑자기 황제의 장막 밖으로 불려갔다. 안쪽은 등불이 켜져 있었으나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까지 줄곧 기다린 뒤에야 황제는 그를 안으로 불러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옛날 선아嬗兒가 짐과 함께 봉래에 올라 신선을 만나려다 바로 여기에서 죽었지.

광록대부, 짐을 원망하는가?

곽광은 고개를 숙이고 고요히 서 있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천자의 눈빛이 제 정수리를 노려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를 맴도는 그림자에서 위안을 얻고자 했을 뿐이다.

신이 어찌 감히 그리하겠습니까. 자후의 명이 박복하고 연이 닿지 않아 폐하의 곁에서 오래 모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감히? 감히 못 한다? 늙은 황제는 여전히 중얼거리며 차갑게 웃더니, 다시 침상에 누워 긴 탄식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 은은하게 물기가 어린 것처럼 보였다.

평양공주와 혼인하기 전까지 위청은 줄곧 아내를 맞지 않았으나, 처음 출세했을 때 위온이 들여 준 첩이 하나 있었다. 이러저러 아들을 세 명 낳은 그는 집안의 안주인은 아니었으되 그 이상의 존재였다. 곽광은 그를 외숙모라고 불렀다.

외숙모는 데리고 다니던 몸종을 곽거병의 시비로 들여보냈다. 위씨 집안 사람들은 어디서 배우지도 않은 버릇을 제각기 타고난 데가 있었다. 두 해가 지나기 전에 몸종은 아이를 배었다.

본래 위 황후는 곽거병이 공주를 받들 만한 전공을 쌓기까지 기다렸다가 위장공주를 그에게 하가시킬 셈이었다. 황제의 장녀인 위장공주는 겉으로는 위 황후처럼 유순하고 얌전해 보였으나 기실은 황실 사람답게 성격이 오만했다. 시녀의 배는 하루하루 불러 오고 있었다. 공주는 들어서자마자 남이 낳은 아이부터 안아 들고 피 안 섞인 적모 노릇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차라리 더는 엮이기 싫다며 시원하게 평양후 조양에게 시집가 버렸다.

유월 한여름, 곽광은 진저리를 내며 책을 읽고 있었다. 시골 학당에서 배우던 것으로는 태학 공부를 따라가기 힘들어서 그는 매일 남보다 두 시진씩은 더 책을 읽어야 했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져서 따라 나가 보았다가, 그제야 아이가 곧 태어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조금 무서워졌다. 평양현에 살던 시절 어머니가 피범벅이 되어 죽은 태아를 낳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산파도 유모도 모두 집 안에 있었다. 외숙모는 비단 끈을 엮으며 안뜰 입구에 서서 분부했다. 빨리 성 북쪽 주둔지에 가서 거병 도련님께 알려라. 오늘은 공무가 끝나는 대로 일찍 돌아오시라고 해.

얼마 지나지 않아 위장공주와 부마 조양이 어린 유거까지 꽁무니에 달고 도착했다. 위장공주는 갓 시집간 신부다운 모습으로 꾸미고 있었다.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입술에는 새붉은 연지를 발라 봄날의 월계화처럼 화사하고 고왔다. 그 때 유거는 갓 여덟 살이었다. 옥 같은 뺨 아래 목덜미가 분 바른 듯 희었다. 자그마한 옥관을 쓰고 큰누이의 손을 잡은 그의 빛나는 눈은 연신 바쁘게 움직였다.

궁에서는 모자가 모두 무탈하다기에 거아据兒와 함께 보러 왔더니, 중간에 말이 잘못 전해진 모양이구나. 상관 없다. 삼촌 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무사히 태어나면 그 때 돌아가서 모후와 고모님께 소식을 전하겠다.

젊은 여자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노라면 연약하고 수줍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그러지 않았다. 곧게 서서 늠름하게 웃었다. 집사가 말을 잘못 전했을 리 없었으나 공주가 그렇게 말하는데 감히 따지고 들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어차피 한 집안 사람인데 다같이 모여 있는 것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유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쑥스러움을 탈 나이였다. 사람들은 그가 어린아이답게 천진하고 앳된 구석이 있으리라 예견하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남들과는 다른 위엄과 꿋꿋함을 드러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큰누이의 손을 놓고는 적당히 얌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한 무리의 친척들 사이에 낯선 이가 있음을 알아차렸는지, 시선이 곽광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위씨 집안 사람들은 다들 예쁘장한 편이었다. 유거 역시 수려하고 산뜻했다. 곽광은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어 참지 못하고 슬쩍 훔쳐 보았다. 문득 두 쌍의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새로 온 아광 형이지? 모후가 미리 알려 주셨어.

유거는 한창 젖니가 빠지는 중이었다. 말할 때마다 조금씩 바람이 새어나와 말씨가 부드럽고 상냥하게 들렸다. 곽광은 갑자기 제 모습이 부끄러워져서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정작 유거의 시선이 물처럼 흘러 자신을 지나치자 또 그것대로 기운이 빠졌다.

왜 말이 없어. 평소에 배운 건 어디다 갖다 버렸냐!

누군가 곽광의 머리를 험악하게 한 대 갈겼다. 등 뒤에 형이 서 있었다. 형은 한 손으로는 곽광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검을 뒤로 가렸다.

태자 전하, 공주, 평양후께 인사 올립니다.

표기장군은 나날이 늠름해지시는군.

곽거병은 매처럼 날카로운 두 눈으로 위장공주를 몇 번쯤 훑었으나, 다시금 기운 없이 고개를 숙였다. 곽광은 생각했다. 만일 형님이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손에 검을 들지 않았다면, 빛나는 전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눈앞에 선 위부와 등 뒤에 가득한 아녀자며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냥 물러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곤란한 상황을 풀어 준 것은 평양후 조양이었다. 한 집안 사람들끼리 격식을 따질 것이 무어 있습니까. 볕이 이리 뜨거운데 얼른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그는 스무 살에 임관했다. 큰 키와 건장한 몸, 반듯한 이목구비에는 권력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사람 특유의 순박함과 사근사근함이 있었다. 남과 싸우는 법이 없고 함께 부귀를 누릴 만한 사람이었다.

늦은 저녁 즈음에 위청이 내조에서 돌아왔다. 태복 공손하도 함께였다. 외숙모는 소리를 죽여 하소연을 쏟아냈다. 안쪽은 바빠서 몸을 뺄 수가 없는데 바깥에 귀한 손님이 이리 많이 와 계시니 소홀한 데가 있을까 겁난다는 것이었다. 위청은 웃고는 사람을 불러 연회를 벌이지 말라고 명했다. 뜰에 큰 자리가 몇 장 깔리더니 새로 잡은 사슴 머리가 나오고 커다란 냄비가 걸렸다.

아직 소년인 위항의 키는 위청의 허리춤에 찬 패도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다. 공손하는 위항을 무릎께에 앉히고 반쯤 손을 이끌어 쥔 채 사슴고기 회 뜨는 법을 가르쳤다. 쌍둥이인 위등과 위불의는 둥글둥글하고 허여멀건 새끼돼지 한 쌍처럼 화롯가에 엎드려 있었다. 아이들은 손 닿는 대로 풀을 긁어모아 불 속에 던지고는 시커멓게 그을린 잎줄기를 보며 킬킬대고 웃었다. 그러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곽거병의 커다란 손에 낚아채였다.

평양후, 드셔 보시지요. 전장에서는 냄비에 양 몇 마리면 백여 명의 한 끼 밥이 된답니다.

위청은 한 그릇을 가득 채워 조양에게 건넸다. 조양은 다소 어쩔 줄을 모르는 듯했다. 그는 공훈을 세운 세가의 자손이었다. 내년이면 종군하여 출정하게 되어 있었으나, 북녘의 추위와 괴로움은 그에게 상상조차 어려웠다.

중경, 우리 그 때 낙타 잡았던 것 기억나시오? 혹의 비계를 삶았더니 정말 맛이 좋았지.

공손하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모래자갈이 갈려 나가는 것처럼 거칠었다.

곽거병은 지루해졌는지 자꾸 아랫사람을 불러 안채의 상황을 물었다. 고작 아이 하나 낳는데 왜 하루가 다 가도록 소식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위장공주가 살그머니 그를 걷어차는 바람에 비취처럼 푸른 수 놓인 신발이 치맛자락 아래로 슬쩍 드러났다 사라졌다. 남은 애를 배고 열 달을 기다렸는데 고작 하루를 못 기다려?

이미 술을 몇 잔 들이켠 뒤라 불그레 홍조가 떠오른 뺨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불시에 허공을 헤매다 제 남편이 어른들과 변방의 싸움에 대해 의논하는 것을 훔쳐보곤 했다. 얼굴에는 기대와 근심이 엇갈리고 있었다.

유거가 오래도록 누이를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물었다. 거병 형, 우리 꼭 싸워야 하는 거야?

흉노를 향한 황제의 원한은 남궁공주가 화친을 위해 먼 땅으로 시집가며 눈물 흘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들 했다. 그렇다면 평화에 대한 유거의 희망은 위씨 여자들의 매일 같은 침묵과 말 없는 근심에서 비롯되었을 터였다.

부황께서는 우리가 흉노를 치지 않으면 흉노가 우리를 칠 것이고, 그럼 백성들은 편히 살 수가 없을 거라고 하셨어. 하지만 흉노가 막북까지 물러났는데도 대한에서는 해마다 군대를 보내잖아. 산동에 큰물이 졌는데도 천하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낙양 창고의 곡식은 구휼에 쓸 수 없댔어. 조상 대대로 모아 둔 양식은 전부 군량이 됐고, 산동의 백성들은 죄수처럼 북방으로 옮겨 가서 성을 지어야 해. 이렇게 싸우다 보면 백성들이 편히 살게 되는 거야?

반듯이 꿇어앉은 유거의 작은 몸은 마디마디 긴장으로 팽팽해져 있었다.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의 저군儲君으로서 전쟁의 의의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곽거병은 위청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이 일에 대해 무어라 말할 계제가 못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위청의 그윽한 눈에 기쁨과도 분노와도 다른 무언가가 드러났으나 그대로 맺혀 깊게 가라앉았다. 유거가 물려받을 대한의 천하는 어느 쪽이어야 하는가, 전쟁인가 혹은 평화인가. 아마도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는 위치였고 유거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것은 위장공주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 아광, 계속 답답해 하는 것 같던데 네가 한 번 말해 봐라. 우리 대한은 싸워야 할까, 싸우지 말아야 할까?

곽광은 놀라서 손발이 다 싸늘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형의 곁으로 다가갔으나, 곽거병은 오히려 등 뒤로 그를 살짝 밀었다. 대답해 봐라. 그냥 한담일 뿐이니 진지하게 생각할 것 없어.

곽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모르며 입을 열었다.

예전 현에 살 때 노, 노래를 부르면서 남에게 밥을 빌어 먹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래 운중에 살았고, 땅도 있었는데, 해마다 흉노 사람들이 와서 양식을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흉노 사람들이 한 사람들을 개처럼 알고 발 아래 짓밟았는데, 위 대장군에게 막북으로 쫓겨난 뒤에는 그들이 상갓집 개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들을 양처럼 알고, 봄에는 우리 안에 풀어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또 잡아 먹는답니다. 차라리 땅을 버리는 것만 못해서, 온 가족이 평양으로 와서 동냥으로 먹고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토를 되찾아 왔다 해도 흉노를 완전히 멸절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편안히 밭 갈고 씨 뿌리며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유치하면서도 꾸밈 없이 사납고 독한 데가 있었다. 좌중의 손님들은 모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공황에 빠진 곽광이 위청을 바라보았더니 위청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곽광은 무거운 짐에서 놓여난 듯 들뜬 채로 남은 밤을 보냈다. 그러다 느긋하게 깨어나 봤더니 몸 위에 얇은 이불이 덮여 있었다. 머리 위의 하늘은 먹처럼 검었고 귓가에는 개구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위청과 곽거병 뿐이었다. 두 사람은 호상에 누운 채 흙으로 빚은 화로를 둘러싸고 있었다. 화로 위에서 술이 데워지는 중이었다. 곽거병이 진지하게 뭔가 말하고, 위청은 귀를 기울여 듣다가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홀짝였다.

꼭 같이 굳건하고 늘씬한 두 사람의 나란한 그림자는 한 쌍의 친형제처럼 보였다.

깼구나.

위청이 그가 깬 것을 알아차리고 손짓으로 불렀다.

곽광은 둘둘 말린 이불에서 기어나왔다. 밤이슬에 옷이 젖어 진저리나도록 추웠다. 그는 두 팔을 감싸 안으며 화롯가에 붙어 앉았다.

춥지. 자, 따뜻할 게다.

위청이 제 손에 들었던 술잔을 건넸다. 곽광은 눈을 깜박이며 쭈뼛쭈뼛 잔을 받아들었다. 과연 따뜻했다. 무모하게 한 모금 마셔 보았더니 목구멍을 따갑게 찌르다 못해 뱃속까지 불이 붙는 듯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삼촌, 아까는 제가 허튼소리를 했어요.

아니다. 맞는 말이었어. 하지만 이 싸움은 언젠가 반드시 끝이 날 거란다.

돌연 멀리서 날카롭고 끔찍한 비명 소리가 밤의 고요를 찢어발겼다. 술에 취해 몽롱해져 있던 곽거병이 즉각 일어섰다.

머리는 산발로 풀어헤치고 온통 땀투성이가 된 여종이 뛰쳐들어와 가느다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도련님, 거병 도련님! 드디어 나왔어요. 아주 통통하고 묵직한 사내아이예요!

삼촌, 삼촌! 들었어요? 내가 아버지가 됐어요. 아버지가 됐다고요!

겅중겅중 설치기는, 그게 어디 애 아버지가 할 행동이냐. 우선 가서 외할머님과 큰외삼촌에게 향불을 피워 소식을 고해라. 아광, 너는 조카에게 가 보려무나.

안채로 들어선 곽광은 산파의 손에서 강보를 넘겨 받았다. 대강 닦아내기만 한 갓난아이의 머리칼에는 아직 피가 엉겨 있었다. 옅은 분홍색 얼굴은 쪼글쪼글한 주름 덩어리였고, 벌어진 입은 우렁차게 울었다. 섬약하고 작은 손발이 강보 안에서 공연히 쉬지 않고 버둥거렸다. 울다 지친 아이가 눈을 떴다. 새까만 물 속에 잠긴 듯한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두리번거리다 두 눈이 마주쳤다. 곽광은 문득 뜨끔 놀랐다. 이렇게나 자그마한데 진짜 사람이라니. 이제 자라면 곧잘 걷고 뛰기도 할 것이고, 아마도 제 아버지처럼 말을 타고 달리며 큰 공을 세울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힘도 없이 곽광의 팔 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동녘으로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창백했던 첫 빛줄기가 고요한 장안을 비추며 눈부신 금빛으로 까마득히 빛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동틀 무렵에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듣고 송구영신의 뜻을 담아 곽선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듬해 막북으로 출정할 때, 위장공주는 평양후 조양에게 아들 조종을 낳아 주었다. 훗날 곽거병이 죽고 조양도 죽은 뒤 위장공주는 방사 난대에게 재가했다. 곽광은 어쩌다 인연이 닿아 장안성을 떠나는 위장공주를 호송하게 되었다. 성 바깥의 장문궁을 지날 때 위장공주는 손톱을 붉게 물들인 손을 들어 높고 큰 궁궐의 담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에 모후께서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와 진 황후가 장문부를 부르는 소리를 들려주신 적이 있었지. 사람이 세상을 사노라면 얻고 잃고 취하고 버리는 일이 모두 마음을 다치게 하기 마련이나, 우리는 그렇게 마음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더랬다.

광록대부, 짐을 원망하는가?

신이 어찌 감히 그리하겠습니까. 폐하가 폐하 자신을 원망하시는 것이지요.





위청은 한증寒症을 앓고 있었다. 원삭 이년에 하남을 칠 때 걸린 뒤로 해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이면 기침이 도졌다. 병세가 심할 때는 조회마저 나가지 못하고 정양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평소 내조에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수장과도 같았다. 자잘한 일 하나하나가 칠한 상자에 봉해져 위부로 왔다가 그가 살피고 걸러내어 결재한 후에야 황제에게 보내졌다.

그러므로 원수 육년 멀리 북방에 나가 있던 곽거병이 황제의 세 아들을 왕으로 봉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을 때, 위청은 그 주문을 가장 먼저 본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그 의견에 찬동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가로막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 몰래 한 갈래의 기병을 보내 북방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그는 전선에 무언가 다급한 사정이 생긴 것이라고, 그래서 곽거병이 뜻밖의 무리수를 두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 무렵 위청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본채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들고 소식을 기다리곤 했다. 마치 제 눈으로 천만 리 바깥을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기다림의 끝은 결국 조파노가 받쳐들고 온 한 자루의 장검이었다.

이 검을 보시거든 관군후가 남면하여 절을 올리며 폐하와 대장군께 죄를 청하는 줄로 알아 주십사 말씀하셨습니다.

위청은 갑주 위에 삼베를 묶고 미앙궁으로 부음을 전하러 갔다. 군을 이끌고 개선하던 때를 제외하면, 그가 말을 타고 입궁하여 검을 차고 전에 오른 것은 그 때 뿐이었다.

폐하, 대사마 표기장군 관군후 곽거병이 훙했습니다.

곽광은 시중으로 궁 안에서 어가를 모시고 있었다. 선실전의 붉은 문은 반쯤 열린 채였다. 그는 제왕이 연신 질문과 질책을 던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붓처럼 곧게 꿇어 앉은 위청의 등도 볼 수 있었다.

열한 살이 된 유거는 곽부로 조문하러 와서 곽광에게 소곤대며 말했다. 거병 형님이 죽어서 부황은 마음이 깨진 것처럼 괴로워하셨어.

야심과 패기로 가득찼던 한실의 제왕은 돌연 불안과 초조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유거를 위해 박망원을 짓고, 장건을 서역으로 보내 귀한 한혈마를 찾도록 하고, 공근과 상홍양을 기용하여 새로운 정책을 펴서 군비를 마련하고, 또 백량대를 쌓아 선인에게 수명 연장을 빌었다.

곽거병의 이름 석 자는 금기가 되어, 이제는 황제가 남을 꾸짖고 욕하는 말 속에서만 들을 수 있었다. 외적이 날뛸 때마다 그는 공손하와 조파노, 심지어는 위청에게까지 불평을 쏟아내곤 했다. 관군후가 있었더라면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안이가 죽었고, 장탕이 죽었고, 장청적이 죽었고, 장건 역시 죽었다. 난대 등의 어릿광대들은 거칠 것 없이 조당을 누볐다. 오직 위청만이 시종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서, 대한의 천하와 번영을 평소처럼 고요하고도 안온하게 지키고 있었다.

하루는 내조에 온 황제가 위청이 휴가를 청했다는 말을 듣고 곽광을 찾았다. 곽광 역시 당직이 아니라 궁에 없었다. 황제는 즉각 대노하여 온갖 귀에 담기 어려운 말을 쏟아내고는, 시종을 불러 한 자도 빠뜨리지 말고 위부에 전하도록 했다. 위청과 곽광이 다급하게 궁으로 돌아오자 또 한바탕 꾸지람이 쏟아졌다.

그 때 곽광은 아직 나이 어렸다. 그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폐하, 오늘은 가형의 생일입니다. 대장군은 신과 자후를 데리고 성묘하러 갔었습니다.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래, 그랬지. 패상의 버드나무에 여린 잎이 새로 돋을 무렵이면 녀석의 생일이지. 그 망할 놈도 이제 스물 여섯이로구나.

예.

위청은 땅에 꿇어 앉아 있었다. 단단한 석상처럼, 상림원의 백량대처럼, 곽거병의 무덤 앞 기련산처럼.

중경. 황제는 길게 탄식하더니 아주 오래 침묵했다. 곽광이 이제 더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겠거니 했을 때쯤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애송이 말이야. 본래 그 녀석이 자네의 근심을 덜어 주리라 기대했던 것인데, 이제는 도리어 그 녀석의 수고까지 자네가 대신하고 있군.

위청은 침묵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 그는 손을 들어 얼굴에 흐른 눈물 자욱을 닦아냈다. 곽거병이 죽은 뒤 두 해가 지나고서야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미앙궁에서 위부로 돌아오는 길에 위청이 곽광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그렇게 폐하께 대서지 말아라.

곽광은 고개를 저었다. 평상시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삼촌이 그런 대접을 받으실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형님도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허허, 그런 대접이라니. 폐하께서는 억조창생을 위해 힘쓰고 계시기에 노하실 때도 있는 것이다. 신자 된 자로서 그 근심을 풀어 드리지 못하는 것만 해도 이미 무능이지. 조금이라도 더 들어 드릴 수 있도록 충심을 다해야 할 일이다.

선실전에서 위청은 정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일까.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곽광은 알 듯 말 듯 했다. 그저 정말 저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을 부당한 대접이라 느끼시지는 않겠구나 싶을 뿐이었다.

위청은 바른 말로 간언을 올릴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렇게 숙이고 따르기만 했다. 훗날 황제가 곽선을 데리고 동쪽 태산으로 순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막지 않았다. 어쨌거나, 위부를 떠날 때만 해도 아이는 튼튼하고 건강하여 어린 송아지 같았던 것이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누가.

원봉 원년, 곽선은 순행길에서 급환으로 죽었다. 대낮에만 해도 살아서 팔팔 뛰었는데 저녁 무렵부터 열이 오르더니 밤을 넘기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황제는 아무런 기척도 없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흐느꼈다. 곽거병과 한 틀에서 찍어낸 양 똑 닮았던 아이는 죽음마저 제 아비와 비슷했다. 반 발짝도 망설이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가 버렸다.

십여 명의 우림군이 검게 칠하고 금박을 입힌 작은 관을 위부로 이고 왔다. 젊은 병사들은 본채 앞에 서서 목이 잠기도록 울었다. 위청은 넋을 놓은 채 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라붙은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리며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 해 위청의 한증은 초가을부터 발작하기 시작해서 이틀쯤 괜찮았다 사흘쯤 심하기를 반복했다. 집안에는 줄곧 약탕기가 나와 있었다.

중경, 너무 상심하지 말게.

신은 상심한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든 것입니다. 나이가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버린 대사마 대장군은 정말로 병장기를 창고에 넣고 군마를 남산에 풀어 주려는 듯했다. 그는 한 마디 땅이 한 마디 금과 같다는 위부 안에다 아예 채소밭을 꾸렸다.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날에는 곧장 작은 채소밭으로 참외를 가꾸러 나가는 것이 낙이었다. 그 동안 바깥에서는 유거가 그 아비와는 영판 다르다는 말들이 분분했고,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이 속을 떠 보러 찾곤 했다. 장안의 거리와 골목마다 위자부가 천하를 가졌노라는 노래가 떠돌았다.

사신 섭하가 조선에서 비왕을 죽인 일로 양국 간의 교류가 끊어졌다. 조정에서는 이 기회를 틈타 오만 명의 죄수들을 징발하여 조선을 치고자 했다. 태자는 이것이 지극히 그릇된 일이라 여겼다. 그는 언관과 대간을 모아 반대 연명 상소를 올렸고, 심지어는 선실전에 들어 황제의 면전에서 그 폐단을 통렬하게 진언했다. 옥으로 된 계단의 위와 아래에 서서, 부자는 거의 독설에 가까운 말들을 주고받았다.

곽광은 유거가 선실전에서 간언하려 하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일부러 위부에 가만히 말을 흘렸다.

소식을 들은 위청은 궁으로 달려가서 외조를 질러 지나쳤다. 그는 선실 측전의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싸늘한 날씨에 그가 입은 것은 조복 한 벌이 전부였다. 북풍이 일 때마다 널찍하고 마른 몸에 걸쳐진 검고 붉은 옷자락이 속세의 먼지를 다 떨쳐내듯 휘날렸다. 그러나 가끔 그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몇 번이고 기침을 뱉었다. 눌리고 무너져 휘어 버린 나무처럼 굽어든 몸은 기울어진 큰 집과도 비슷했다.

조회를 끝내고 나온 황제는 높은 계단 위에서 오래도록 차갑게 내려다 보다, 한참 뒤에야 느리게 입을 열었다.

와 있었군. 외조카 편을 들어 짐을 비난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짐을 도와 외조카의 버릇을 가르치러 온 것인가?

폐하께서 조선을 치려 하신다기에 출전을 청하러 왔습니다.

잠시 굳었던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계단을 내려와 위청의 두 손을 잡고, 이끌어 부축하며 측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늦가을의 맑은 햇살이 그들 위로 내리쬐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모두 물러가라! 짐은 대장군과 더불어 중대한 군사 기밀을 상의하겠다.

위청은 나이가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황제 역시 그렇게 웃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곽광은 공황으로 가득차 위부에 돌아와서는, 동쪽 별채에서 오래도록 괴롭게 기다렸다. 노복들은 위청이 저물녘에야 귀가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침으로 목이 상해 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상 위로 쓰러졌다. 낭중이 또 침을 놓고 약을 먹이고 한참을 돌본 뒤에야 아주 천천히 깨어났다.

광 도련님, 대장군께서 부르십니다.

곽광은 총총히 조복을 벗어 내리고 집에서 입는 옷으로 갈아 입은 뒤 위청의 침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위등이 안에서 답했다. 아광이지? 들어와.

그러나 곽광은 문가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한밤이었다. 바람이 위부의 죽림을 쓸자 마른 잎들이 오열하듯 부스럭거리며 두려운 소리를 냈다. 오래지 않아 방문이 열리고 위등이 나왔다. 그는 한참 곽광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낭중의 말로는 급히 나가시는 바람에 한기를 쐬어서 그런 것이래. 바람을 피하고 정양하면 내년 봄에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어. 방에 약이 있는데, 갓 달인 것이니까 조금 식혔다가 마시게 해 드려.

침실은 등을 많이 두지 않아 어두침침했다. 침상이 있는 구석만 유독 밝았다. 위청은 중의를 입고 머리를 풀어 내린 채 기대어 반쯤 눕듯이 앉아 있었다. 허리께 아래로는 암록색의 비단 이불을 덮었다. 그가 손을 뻗으며 불렀다. 아광, 왜 그러고 문가에 서 있느냐. 추운데 이리 들어와라. 잠이 안 와서 너와 이야기나 좀 하려 한다.

곽광은 침상 곁에 깔린 자리 위로 앉았다. 아직 따끈한 것이 아마 조금 전까지 위등이 여기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옆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 약사발이 놓여 있었다. 시커멓고 맑은 약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곽광은 그릇을 들어 바닥을 더듬어서 온도를 가늠하고는, 한 숟갈 떠서 후후 불어 위청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삼촌, 따뜻할 때 드세요.

위청은 웃었다. 내려놓거라. 내가 어디 떠먹이는 것을 받아 먹을 만큼 늙었다더냐.

형님 대신ㅡ 곽광은 갑자기 목이 메었다. 형과 조카를 묻었던 두 손에서 돌연히 힘이 빠져 나가며 떨려와 손에 든 그릇을 엎어 버릴 것만 같았다. 형님 대신 제가 효도를 다하는 것뿐입니다.

내게는 너와 거병 모두 똑같은 내 외조카다. 너희가 자라나는 것을 내내 지켜보았고. 허나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 나 위청은 결국 누님에게 기대어 부귀를 누리는 외척이겠지. 네가 큰일을 하고 싶거든 내 외조카여서도 안 되고, 위씨 집안의 사람이어서도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내가 본래 정씨였던 것은 알고 있겠지. 정가에서 나를 버렸기에 위씨를 성으로 삼고 어머니를 따라 공주부에 가서 노예가 되었다. 매를 맞기 싫어서, 배불리 밥을 먹고 싶어서였어. 그러다 훗날 좋은 기회를 만났던 것이고. 돌이켜 보니 어느새 위씨 가문은 커다란 한 그루 나무가 되어서 띠와 넝쿨처럼 수많은 사람이 얽혀 있더구나. 거아는 그 나무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게다. 나무가 높이 자랄수록 앉은 자리도 높아지겠으나, 내가 죽은 뒤 나무가 쓰러진다면 높이 있었던 만큼 지독하게 떨어지겠지.

삼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조선을 치러 출병하신다면서요.

그건 농담이었는데 못 알아들은 게냐. 그렇게 꺼릴 것도 아니고, 네게 말해 둘 일이 있어서 오라고 했다. 오늘 폐하께서 내게 평양장공주를 받들라 명하시더구나.

장공주의 손자가 벌써 몇 살인데 이제 와서 재가를 하신단 말입니까.

말조심해라. 나는 오래도록 정식 아내를 맞지 않았지. 항아의 어미도 죽을 때까지 첩이었다. 장공주는 나의 주인으로서 일찍이 나를 돌봐 주시고 천거해 주셨던 은덕이 있다. 이제 내게 하가하고 싶으시다는데 나 위청으로서는 감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복락이지.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느냐.

폐하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명심해라. 거아는 내 외조카일 뿐만 아니라 폐하의 아들이자 장공주의 조카이며 대한의 모두가 기대를 걸고 있는 태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폐하 스스로도……

아광, 이건 지금껏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다. 내가 용성을 치던 해에 셋째 누님이 회임을 하셨다. 폐하는 이미 공주가 셋 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황자이리라고 기뻐하셨지. 그러더니 내게 무슨 이름을 붙이면 좋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황실의 집안일에 신자가 감히 끼어들 수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어차피 아명이고 관례를 올릴 때 바꾸면 되니 무엇이든 말해 보라고 하시더구나. 허나 나는 어릴 적에 서책이라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폐하를 따라 입궁한 뒤에야 내 이름자라도 배워 쓰게 되었고, 전장의 책략을 다룬 병서밖에 보지 못했어. 언제 성인의 글을 읽어 봤겠느냐. 허나 그 때는 나도 어려서 폐하의 농담을 진담인 줄로만 알았다.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짜내어 이렇게 말씀드렸지. 천하의 근심을 없앨 수 있는 자는 천하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며, 천하의 위험을 도울 수 있는 자는 천하의 평안함을 가질(거, 据) 것이라고.

곽광은 하나 하나 되짚어 보았다. 유거와 장평후 위항은 비슷한 무렵에 태어났었다.

삼촌은 매를 맞지 않고 배불리 밥을 먹는 것보다 천하의 평안을 더 중히 여기셨던 게 아닐까요.

위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핏기 없이 검푸르던 그의 얼굴이 점점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전쟁과 질병, 세월로 그 빛이 마모되긴 했으나 그렇게 웃으니 여전히 준수하고 당당한 태가 남아 있었다. 나는 말을 끄는 노예였을 뿐이야. 천하는 무슨 천하.

그는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 곽광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바닥의 감촉은 거칠었고 아주 따뜻해서, 곽광의 마음에 낙인처럼 깊게 새겨졌다.

내 이름으로 중유 형님께 서신을 한 통 보내서, 혼사를 주선해 주십사 말씀드려라. 가문은 볼 필요가 없다. 그저 사람이 깨끗하고 어질면 그걸로 좋은 게야.

삼촌……

내 말대로 해라. 혼인하고 나면 이 집에서 나가도록 하고. 내가 죽은 뒤에는 조문도 오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마라. 알겠느냐?

싸늘하게 텅 빈 자욱만 남기고 위청은 손을 놓았다. 곽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천히 놓았다. 마음이 따스하고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아광, 앞으로는 성심을 다해 폐하를 모셔야 한다. 실낱만큼이라도 참람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네가 무엇을 하고자 해도, 폐하께서 계신 다음에야 네가 있는 것이다.

위청에게 있어 천하의 복락은 모두 한실의 것이었으며 한실은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의 포부, 운명, 감정과 충성은 다같이 한데 얽혀 나뉠 줄 몰랐다.

곽광은 조심스럽고 정중한 태도로 예를 올린 뒤 침실에서 나왔다. 위등이 기둥에 기대어 문간에 앉아 있었다. 하얀 여우털 모피를 두른 채 양 팔을 감싸 웅크리고 있던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깨서는 잠에 빠진 눈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곽광은 그를 당겨 일으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 일 없으셔. 방금 약 드시고 잠드셨어.

으응. 지금 입조하려고? 위등은 웅얼거리며 털옷을 벗어 곽광에게 건넸다. 조심해. 눈 내릴 것 같던데.

그 털옷 역시 따뜻했다. 곽광은 제 몸을 잘 감싼 뒤 바깥으로 걸어 나가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위등을 바라보았다.

채소밭의 참외마냥, 그들 모두는 기어이 위청이 바라던 모양새로 자라나 있었다.





위청은 늘 의원 보이기를 꺼려 왔으나, 그 해 겨울에는 드물게도 후한 예를 치르고 장안성의 명의들을 모셔와서는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말을 들었다. 과연 봄이 다가오자 부쩍 기운이 돌아 혼례에 쓸 기러기도 쏘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은으로 된 갑주를 입고 준마를 몰아 장공주를 맞으러 가는 길에는 온 장안의 백성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당당하고 멋있는 대장군의 모습을 구경했다.

평양장공주의 머리칼은 이미 반백이었고 얼굴에도 주름이 겹겹이었으나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 기품이 있었다. 취련에서 내린 그를 올려다 보는 위청의 얼굴에는 존귀하신 아씨를 흠모하는 소년 노예의 부끄러움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이 제 운명을 평화롭게 받아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다 좋았으나 아쉬운 것은 이 혼례가 황궁에서 거행되지 못하여 황제와 황후 역시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후한 상급과 황제가 직접 썼다는 축하 서신을 들고 위부로 온 것은 태자 유거와 장공주 뿐이었다.

음악에 끝이 없으니 밤도 저물지 않더라ㅡ 향유로 불을 피운 등잔이 무수히 놓여 대낮처럼 밤을 밝혔다. 실과 대로 빚어내는 가락들은 장안성의 절반을 가득 채웠다.

늦은 밤이 되었으나 술에 취해 귀까지 벌개진 고관대작들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유거는 죽림에서 조용히 쉬고 싶어 했다. 곽광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그를 따랐다.

조용한 뜰을 지나 사람이 없는 곳에 이르렀을 때 유거가 문득 말했다. 청 삼촌이 혼인하는데 부황께서 오실 리 없지.

곽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눈과 귀가 있는 만큼, 낭관에서 광록대부가 되는 동안 황제와 위청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대강 알게 된 터였다.

아광도 혼인을 한다면서.

예.

어느 댁의 따님인가?

평양현의 시골 여자입니다. 어릴 적부터 아비를 여의고 힘들게 사는 것을 아버지가 가엾게 여겨 양딸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족끼리 또 가족이 되는 셈이군. 용모와 품행은 어떠한가?

신은 어려서 집을 떠나 그와는 아직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집에서 보낸 서신에 의하면 아주 못나지는 않았다 합니다.

혼사는 언제로 정했고?

아버지의 건강이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올 여름에 데려와 혼례를 치러야 아버지가 마음을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뜻은?

혼사는 전적으로 부모의 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이 십여 년을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부모 슬하에서 모시지 못한 것만 해도 이미 불효입니다. 혼사는 두 분의 일이고, 신은 아무 다른 뜻이 없습니다.

네가 왜 혼인하려는지 알아. 허나 나도 네가 혼인할 때는 가지 않을 것이다.

곽광은 깜짝 놀라서 멈춰 섰다. 그에게 유거는 종일 타오르던 한낮의 해가 진 후 고요히 떠올라 따스하고 장엄하게 빛나는 달과도 같았다. 그런 반면 자신은 그저 위씨의 광휘 아래 흐릿한 그림자일 뿐이었는데.

전하.

그는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유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한 번 웃고는 다시금 앞서서 걸어갔다. 멀어지는 유거의 형체가 겹겹이 드리운 죽림 그림자 속으로 묻히고 관 위의 진주만이 아득히 먼 빛을 흩뿌릴 때쯤에야, 곽광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그 죽림은 본래 상림원의 대를 나누어 심은 것이었다. 위청이 죽은 이듬해 상림원의 대나무가 꽃을 피우더니 위부의 죽림과 함께 모두 말라 죽어 버렸다. 하루는 상림원에서 쉬던 황제가 문득 말라 죽은 죽림에 들러, 대나무 열매를 주워 오도록 명했다. 봉황이 먹는 길한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작은 포대에 가득하게 열매를 모아 오자 그는 한 알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가, 두 번쯤 씹고는 곧바로 뱉어냈다.

퉤, 비리고 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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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대나무는 수십 년을 살면서 평생에 한 번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은 뒤에는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