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花楚
원문 : http://linegoe.lofter.com/post/2d359d_88fe6b9
이감이 죽었다.
흐늘거리는 시체가 말등에 가로 누웠다. 목에 찔러박힌 화살 끝에는 ‘표기장군곽’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황제는 다가가서 화살의 꼬리깃을 꺾어 땅에 버리고, 말했다. 관내후가 사슴에 받혀 죽었구나. 다들 사냥을 계속하라.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것만큼 황당한 일이었으나 곽거병에 대한 황제의 총애와 믿음을 명백하게 전달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너무 졸렬하여 오히려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감이 위청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은 아는 자도 있었고 모르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씨 집안의 수 년에 걸친 원한은 모두가 잘 알았다. 급암은 황제가 늘상 나중에 오는 자를 위에 올리는 식으로 사람을 쓴다고 말했다. 거대한 산 같은 위청이 이광을 산 채로 눌러 죽였다. 이제는 또 곽거병을 들어다 위청을 누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곽거병은 뚜렷하게 위청보다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이광이 전장에서 한을 품고 죽었다. 올해 삼월에는 이채 역시 애매모호하게 죽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가의 마지막 대들보까지. 어쩌면 이씨 가문을 정리할 마음을 먹은 황제가 이왕 하는 김에 위씨와 곽씨의 명성까지 먹칠을 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음으로 혹은 양으로, 뼈마디를 부러뜨리되 힘줄은 남겨 두는 애매한 방식으로. 누가 그 내막을 짐작하랴.
필경 위청은 난처한 지경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는 억지로 분노를 덮은 채 가을 사냥을 끝낸 뒤, 장안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곽거병의 등짝을 활로 후려 갈겼다. 활이란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두는 법이라 단단하고 굵은 몽둥이나 다를 바 없어 강한 힘도 곧잘 받아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위청이 온 힘을 다해 때린 활로 맞은 곽거병은 몇 발짝이나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후작을 금원에서 죽이다니, 이는 일족을 주살할 죄다. 너는 왕법조차 안중에도 없느냐!
이감이 관저에 쳐들어와 대사마 대장군을 죽이려 한 것도 큰 죄입니다! 상황을 알면서도 위에 고하지 않고, 그와 같은 폭도를 비호하여 사냥에 나서는 어가를 따르게 한 것 역시 큰 죄입니다! 왕법이 안중에 없는 것은 대장군이겠지요!
황제가 잡았던 거의 다 자란 새끼 호랑이처럼, 곽거병은 분기를 감추지 않고 내쏟으며 대들었다. 위청은 그의 궤변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가, 손을 들어 올렸다가, 차마 다시 때리지 못하고 기둥에다 휘둘렀다. 강궁이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나뭇조각이 멀리 튀었다.
사당으로 가라. 가서 무릎 꿇고, 반성할 때까지 일어나지 마라.
위부의 사당은 기이하게 작았다. 모신 위패는 위온과 위장군衛長君 둘 뿐이었다.
위온은 성과 이름이 없었다. 혹은 있었는데 망각당했는지도 모른다. 어려서 조가의 가기로 팔렸고, 성년이 되어서는 상으로 내린 물건처럼 집안 관리의 첩이 되었다. 장안성의 현달하고 부귀한 집에 그와 같은 첩실들은 많았다. 비천하고 빈한하며 가진 것 없기에 성적으로 거리낄 것 없는 이들이었다.
그의 침상에 오르내리던 남자들은 한 꿰미의 아이들을 남기고 갔다. 다행히 하늘도 무심치 않아서 첫 아이는 굳세고 의연한 성품의 아들이었다. 가난하고 척박하여 남은 것이라고는 미모와 눈물 뿐이었던 노예 가족에게 장자 위장군의 의미는 특별했다. 그는 들보이자 기둥이었고 온 집안의 여자와 아이들에게 좁으나마 몸 둘 곳이 되어주는 한 조각 하늘이었다.
한 번은 위군유가 부에 찾아와 한담을 늘어 놓다 술을 많이 마시고 취한 적이 있었다. 술기운에 서글퍼진 그는 당 아래에서 흥을 돋우던 무희를 보며 말했다. 옛날 우리가 딱 저랬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남을 즐겁게 해 주었지만 정작 우리는 괴로웠어. 소아 그 계집애가 실수로 애를 뱄을 때는 같이 버텨 줄 남편도 없었잖아. 그래서 몰래 쇄골자를 집어 먹었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거의 죽을 뻔했지. 어머니가 그 애를 끌어안고 밤새도록 울었어. 다행히 견뎌는 냈는데 애도 안 떨어진 거야. 그 때 큰오빠가 그랬지. 약 때문에 모자란 애가 되든 팔다리 없는 애가 되든, 이 애는 위씨고 위장군의 아들로 키울 거라고. 낳고 보니 손발이 큼지막했어. 그런데도 오래 못 살까봐 이름을 거병이라고 붙였지……
그리고 아청도 있었지. 그 때 막 평양에서 장안으로 돌아온 참이었는데, 한겨울이었는데도 홑옷 차림에 신은 다 찢어져서, 조그만 몸뚱이에 살이라고는 없이 온 몸이 뼈다귀 같아서는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혼절해서 쓰러졌어. 나는 저녁 연회에 다녀와서 밤새도록 너를 안고 행여나 숨이 넘어갈까 밤새도록 눈도 못 붙였다. 네가 깨어나더니 내 품에 안겨서는 나더러 혹시 우리 엄마 아니냐고 멍청하게 묻는 거야…… 큰오빠가 쌀죽을 먹일 때는 거의 큰오빠 손까지 씹어 먹을 뻔했지……
위장군이 가족들에게 준 안정감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하루에 개떡 반 개가 전부였던 위청을 배불리 먹이고, 무희 위소아가 아비 없는 아들을 낳아 키우며, 가희 위자부가 제 몸을 정결히 지켜 남편감을 기다릴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지나치게 어려서부터 노심초사했던 탓에 위장군은 젊어서 요절했다. 그는 아내도 없었고 공훈도 없었다. 짧았던 삶은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듯 소리도 없이 흘러가 버렸고, 이제는 위씨 집안 사람들의 침묵 속에 가라앉은 기억으로만 남았다.
곽거병이 오래도록 사당에 꿇어 앉아 참회하는 동안 밥도 물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전장의 장군이었으므로 몇 끼 굶는 것쯤이야 예삿일이었으나, 물도 없이 버티기는 어려울 터였다.
외숙모는 몹시 마음 아파했다. 그는 위청을 달래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정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위청은 딱 한 마디만 했다. 내 차라리 그 아이를 굶겨 죽일지언정, 제멋대로 굴다 온 집안을 연루시키게 두진 못하겠다.
궁에 전해진 소식은 위 황후까지 놀라게 했다. 그는 밤을 도와 출궁하여 위부로 향했다. 위청은 대문 밖으로 수레를 맞으러 나오지 않았다. 그 뜻을 알아차린 황후는 곧장 사당으로 들어섰다.
가을의 한중간이었고 날은 아직 더웠다. 한나절을 꿇어 앉아 물도 곡기도 입에 대지 않은 곽거병은 이미 버티지 못하고 눈이 흐려져 있었다. 비몽사몽 헤매는 곽거병의 곁에서 곽광은 그저 어쩔 줄을 몰랐다.
위 황후는 홀로 들어섰다. 편복 차림으로 연지와 분도 바르지 않았으며 머리칼도 그저 간단하게 틀어 올린 것이 전부였다. 문 밖에서 비쳐 오는 달빛이 온 몸을 에워싸 선녀 같은 그 아름다움을 더한층 빛냈다.
곽광이 예를 올리려 하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집안에서는 나라의 예를 행하지 않는다. 광아는 걱정 말고 얼른 들어가 자거라. 내가 거병과 함께 있을 터이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황후는 제단 앞 깔린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두 위패를 바라보았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위청이 화급히 닥쳐들더니, 쿵 하고 문턱 밖에서 절을 올렸다.
황후께서ㅡ
큰오빠가 떠나면서 거병을 너와 나 둘에게 부탁했더랬지. 이제 아이가 잘못 자란 것은 이모인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 마땅히 함께 뉘우쳐야 할 일이다.
그런…… 이런 식으로 감싸고 도시면 저도 방도가 없습니다.
위 황후는 일어서서 치맛자락의 구김을 펴고는, 거병을 향해 섬섬옥수를 내밀었다.
거병아, 일어나라. 청 삼촌에게 잘못했습니다 해야지.
작은이모, 이감 그 놈이ㅡ
철없는 것아. 이감이 삼촌의 손을 상하게 한 것만 생각하고, 네가 이러면 삼촌의 마음이 상하는 것은 왜 생각을 못 해? 너도 이제 아버지가 되었잖아. 선아가 크면 제 아비 하는 꼴을 보고 배울 터이니 네 말도 안 듣겠구나. 그 때 가면 어찌하나 보자. 자, 얼른.
작은이모, 제가ㅡ 아이고, 아니에요. 다리가 저려서ㅡ 대장군, 소장이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삼촌, 거병이, 거병도 잘못했습니다.
아우님도, 아이가 변변찮게 굴거든 천천히 가르칠 일이지. 이렇게 다짜고짜 밥도 물도 굶겨서야 쓰겠어.
저 나이 먹도록 세상 물정을 모르잖습니까!
몇 살이나 되었는데? 네가 이만한 나이였을 때는 사막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으면서 폐하께서 상곡에 가라고 하시니 덥석 알겠다고 하지 않았어? 큰오빠가 계셨으면야 그냥 가도 괜찮았지. 하지만 그 때 큰오빠는 갓 세상을 떴고, 사내는 너 하나라 온 집안의 위아래가 너만 보고 있었는데도 굳이 싸우러 나갔잖아. 내가 아무리 울거나 말거나 한 번이라도 내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
위 황후의 어조는 평온하고 부드러워서 한담을 늘어 놓는 듯했고, 옛 일을 추억하는 즐거움도 한 가닥 묻어났다. 그러나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 한 방울은 그대로 느릿하게 뺨을 타고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늙은 황제는 오랜 꿈에서 막 깨어난 것마냥 궁중에 불러모았던 방사와 도인들을 쫓아냈다. 전각과 누대마다 지었던 제단을 부쉈고, 무고의 난으로 출셋길에 오른 상구성과 마통을 죽게 만들었다.
두 죄인의 머리는 장안으로 보내졌다. 늙은 황제는 새끼줄로 두 머리를 꿰어 동쪽 순행 내내 가지고 다니다가, 사자궁의 영전에 올리는 제물로 삼았다.
거아가 말했었지. 대장군 같은 기인을 짐에게 내려주어 흉노를 막북 너머로 쫓아 버렸으니 하늘이 대한을 돌보시는 것이라고. 허나 결국 중요한 것은 민심의 안정ㅡ 큰 싸움이 끝난 후에는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백성을 편히 쉬게 해야 하며 그렇지 아니한즉 옛적 진秦의 말로를 밟게 되리라고 하였다. 어진 정치를 행하라면서……
궁 후원의 높은 누대 위에서, 늙은 황제는 아주 오래도록 서 있었다. 몸은 비쩍 말라 구부정했고 허옇게 센 머리 아래 피부가 쪼글쪼글했다. 장엄하고 위대해 보이도록 크게 지은 예복이 바람을 맞아 쟁그렁거렸다.
이미 바람에 말라붙어 일그러지고 무너진 머리통들이었다. 밧줄에는 흑갈색의 진한 피가 엉겨 있었다. 유거를 몰아붙여 자결하게 만들었던 그 날, 그들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곽광은 낯익으면서도 생소한 두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남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따름이었다. 어제는 남의 손에 들린 칼이었다가 오늘은 칼 아래 제물이 된 것이다.
땅바닥에 드리운 늙은 황제의 그림자를 고개 숙여 바라보며 그는 그저 생각했다. 이른바 천자라는 것도, 하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어진 정치를 행하는 데에는 네가 짐보다 낫지……
얼어붙었던 곽광은 잠시 뒤에야 그것이 제게 하는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황제는 죽은 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전 연왕 유단이 장안으로 올라와 숙위하겠다고 글을 올렸다가 늙은 황제에게 호되게 문책을 당했다. 정호궁에서 크게 앓았던 때처럼, 늙고 지친 황제는 다시금 삶에 대한 집착을 놓고 제 사후의 일을 앞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거를 지키기 위해 다른 황자들은 어려서부터 장안에서 쫓아내어 즉위할 가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번왕으로 앉혀 두지 않았던가. 그들은 용렬하고 무능하여 대업을 이을 그릇이 못 되었다. 남은 것은 늦둥이 유불릉 뿐이었다.
짐이 주었던 그림의 뜻은 알아보겠는가?
주공이 성왕을 보좌하는 그림을 말하는 것이었다. 곽광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을 뿐,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알았으면 되었다.
유모가 어린 불릉을 데리고 왔다. 아이는 눈치 빠르게 먼저 늙은 황제에게 예를 올리고는 반갑게 웃으며 곽광에게 달려들었다. 안아 달라고 두 손을 내밀며 광 대부!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마냥 어린아이다웠다.
불릉은 아직 일곱 살도 되지 않은 아이였으나 열 살 넘은 아이들보다도 몸집이 컸다. 곽광도 나이가 든 터라, 어린 불릉을 안아들고 늙은 황제를 따라 높은 누대를 천천히 내려가노라니 얼마 못 가 온 몸에 땀이 엷게 배었다.
대 아래에서 기다리던 구익부인이 곽광을 보더니 만면에 희색을 띄웠다. 그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야심만만했다. 그러나 맑은 도랑물처럼 단순하고 천진하여 한 눈에 속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호위 대오에서 돌연히 두 명의 우림이 뛰쳐나와 구익부인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끊임없이 고함을 질러댔다. 어린 불릉이 멍청하니 고개를 돌리려는 차에 곽광은 아이의 머리를 껴안고 제 목덜미로 그 얼굴을 묻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을 맨 눈으로 볼 필요는 없을 터였다.
늙은 황제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이 누대의 이름은 돌아오기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었지…… 아광, 네 삼촌이 너를 제대로 가르쳤구나. 내 아들이 나이 어려 어미를 잃었으니 네가 잘 보좌하여 이끌어야 할 것이다.
곽거병이 죽은 뒤 황제는 강보에 싸인 곽선에게 관군후의 작위를 계승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후라는 자까지 지어 주었다.
부귀가 넘쳐흘러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서를 받아든 위청은 어쩌지도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광, 네가 대신…… 허허, 네가 선아 대신 성은에 감사 인사를 올려야겠다.
어쨌거나 황제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수는 없었다.
못난 아들놈 셋이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 곽자후까지 더해졌구나. 관군후의 봉읍과 저택 모두 나와 비길 만할 터인데, 명분으로야 선아가 물려받은 것이지만 너는 선아의 숙부이니 네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조심히 관리하여 함부로 써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거병의 상복을 벗고 나면 선아 모자를 데리고 그리로 가서 살려무나.
곽광은 죽을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와 위씨 집안의 친척 관계란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곽거병이 없어지고 나니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의 집에 빌붙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장안에 달리 집이 없었다. 형이 죽었다는 슬픔과 두려움이 새삼 치받혀, 곽광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울지 마라. 이 녀석, 눈물이랑 콧물을 한 소매로 다 닦으면 안 되지. 삼촌이 너를 쫓아내겠느냐. 알았으니 이제 그만 울거라. 형제가 아주 똑같구나.
사실 곽광의 생김새는 형과 별로 닮지 않았다. 그는 작고 말랐으며 살갗이 희고 눈매가 청수하여 여자 같은 데가 있었다. 기마나 궁사에도 능하지 못해 커다랗고 단단한 사내 낭관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못했다. 그래서 곽거병은 진작부터 그를 문리文吏로 추천하였고, 어려서부터 단련된 곽광은 예의범절에 통달하고 우아한 언사에 능숙한 사람이 되었다. 위씨 집안의 세 아이들은 위청 때문에 집안에 갇혀 책 읽고 공부만 할 뿐 사관을 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정도는 곽광을 질투했다. 그러나 사고를 치고 나면 언제나 그를 제일 먼저 찾아와서 광 형님, 하고 애교를 부리며 어른들 앞에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곽선은 제 아버지와 똑 닮아 튼튼하고 건강했으며 고집 세고 장난기가 심했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할 때부터 새총을 들고 나무에 기어올라 지나가는 사람을 진흙덩이로 쏘아 맞추곤 했다.
위청은 나이 먹어 어린아이들에게 몹시 관대해져 있었다. 게다가 곽선이 어려서 아비를 잃은 것을 가련히 여겨 차마 꾸짖지도 못했다. 그저 감싸고 돌기만 하는 것이 나날이 심해졌다.
오래지 않아 작은 관군후의 ‘명성’은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사흘이 멀다 하고 곽선을 입궁시켜서 말타기며 활쏘기에 데리고 다녔다.
순탄한 나날이었다. 외적이 쳐들어오지도 않았고 내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그럴듯한 신인이나 도참조차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다. 매일 보이는 것이라고는 주판알을 튕기는 상홍양이 아니면 장탕 대인과 장청적 대인이 개처럼 서로 물고 뜯는 모습 뿐이었으니, 황제도 분명 무료했을 것이다.
곽선은 나이 어린 데다 오냐오냐 자란 탓에 위의 뜻에 맞추는 일 따위는 할 줄 몰랐다. 한참 놀고 나더니 지쳐 늘어져서는 떼를 쓰기 시작했다. 마침 꼭꼭 시각을 맞추어 황제를 문안하는 유거가 와서 황후가 이미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고 알렸다. 그 무렵 황제는 이미 황후를 그다지 찾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곽광에게 곽선을 데리고 황후의 소양궁으로 가서 쉬라고 명했다.
곽선은 그에게 엉겨붙었다. 실컷 신나서 달리고 뛰며 놀고는, 기운이 다 빠지고 나니 걸음도 걷기 싫어 어른의 품에 안겨서 자려는 것이었다. 마른 곽광은 크고 튼튼한 아이를 안아든 채 커다란 궁원을 걷느라 절반도 가기 전에 땀범벅이 되었다.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유거가 그를 돌아보고 웃었다.
그리 지쳐서야. 선아야, 이리 와라. 거 숙부가 안아 주마.
전하께 어찌 그런 수고를ㅡ
곽광은 아랫사람을 부르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미 숲의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었고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묘하게도, 문득 얼굴이 달아올랐다.
유거는 황제와 엇비슷하게 키가 크고 위엄 있는 체구였다. 곽광보다 머리 반 개는 커다란 그는 한 손으로 곽선을 안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 손수건을 건넸다.
아광, 땀을 닦아야겠다.
곽광은 놀랐다. 예전에는 언제나 형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결에 호칭이 바뀐 것일까. 그는 태자이고 군신 간에는 존비의 차이가 있으니 어떻게 부르든 그의 마음대로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친근하고 격 없는 호칭이라니.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곽광은 고개를 숙이고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손을 꽉 움켜쥐니 가슴에서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꿈결처럼 흐릿하고 아름다운 상념들이 슬그머니 마음에 맴돌았다. 들뜨고 황홀했다. 그렇게 걸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곽광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숲의 성긴 그림자와 싱그러운 젊음만이 반쯤 섞여 떠오를 뿐이었다.
위 황후의 말이 예언이라도 되었는지, 곽선은 과연 제 아비마냥 말을 안 듣는 아이였다. 곽거병이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책 하나를 다 읽기도 전에 선생을 일고여덟 명은 떠나게 만들었다. 위부에서 청해 온 선생들은 모두가 학문에 통달한 유자들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잘못 보일 수는 없었다. 곽광은 예물을 챙겨 집집마다 다니며 선생에게 사죄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려 온 몸이 흠씬 젖었는데, 문턱을 들어서자마자 곽선이 비를 무릅쓰고 호숫가로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작은 도련님은 광 도련님께 혼이 날까봐 숨은 거예요.
곽광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고삐를 당겨 다시 밖으로 나섰다. 멀리 인영이 보였다. 아주 자그마한 그림자가 우산을 받쳐 든 채 고집스레 빗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말에 채찍질을 하며 몇 번이나 외쳐 불렀으나 곽선은 아무것도 못 들은 양 더 빨리 뛰어갈 뿐이었다. 곽광은 기마에 썩 능하지 못했는데도 마음이 급한 탓에 고삐를 놓고 아이를 안아 들려고 손을 뻗었다. 겁에 질린 곽선이 몸을 돌려 피했다. 허공을 짚은 곽광은 중심을 잃고 말안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잠시 기절했던 그는 곽선이 울며불며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삼촌! 죽으면 안 돼! 죽으면 할아버지삼촌이 날 때려 죽일 거예요!
상갓집 곡소리가 따로 없었다. 곽광은 아이의 엉덩이를 한 번씩 호되게 후려갈긴 뒤에야 아픔을 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삼촌까지 갈 것도 없이 내가 혼내 주마.
곽광도 거지반 다 자란 청년이었다. 일어설 수 있으니 되었다 싶었다. 시끄럽게 굴고 싶지도 않아서, 그는 곽선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벗어 보니 등은 검붉고 푸르게 멍이 들고 돌에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마침 비가 내린 탓에 피가 씻겨내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다, 선아야.
곽선은 코를 훌쩍이며 응, 하고는 빨개진 눈으로 약을 발라 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생이라고는 한 적이 없어 몸이 깨끗했다. 새로 난 상처 외에는 허리께를 버들가지처럼 가로지르는 흉터 몇 개 뿐이었다. 평소에는 드러날 일 없던 것인데 지금은 옷을 벗었으니 곽선의 눈에도 보였다.
삼촌, 이건 삼촌네 아버지가 때린 거야?
곽광은 속으로 생각했다. 제 아버지면 곽선에게는 친할아버지인데 버릇없게 삼촌네 아버지는 뭐란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외아들에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다. 집안의 보물이었다면 모를까 몽둥이질을 당할 일이 있었을 리 만무했다. 그는 약간 비뚤어져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때린 거다.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가 삼촌을 왜 때려?
내가 말썽부리고 공부를 열심히 안 하니까 때렸지.
기실 그렇지는 않았다. 곽광은 얌전하고 공부를 좋아했다. 그러나 처음 장안에 왔을 때는 태학의 학생들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혼자 집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동안 남이 소리를 들을까 부끄러워서 입속으로 구절을 외우곤 했다. 평소 곽거병은 그의 일에 상관하지 않았으나, 그 날은 국경 방어를 의논하다 무슨 이유인지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동생이 복습하는 것을 보고 기분을 풀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보고 있을수록 화가 치솟았는지 꾸지람이 쏟아졌다.
무슨 책을 소리도 안 내고 읽어. 그러다 속 터져 죽겠다. 큰 소리로 읽어라. 누가 좀 들으면 어떻다고.
그 후로 칠팔 일 동안, 곽거병은 집에서 활쏘기를 연습할 때마다 곽광을 데리고 나와서 책을 외우게 시켰다. 곽거병은 그 책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곽광이 외우는데 틀리거나 빠진 곳이 있을 때마다 손 가는 대로 화살을 뽑아 허리께를 때렸다. 그렇게 좌전 한 권을 다 외우고 나니 십여 군데 흉이 남았다.
그러나 그 한 권 뿐이었다.
곽선이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가 있지.
곽광은 빙그레 웃고는 몸을 웅크려 침상 한켠을 곽선에게 내주었다. 품에 안긴 작은 몸뚱어리는 꼭 화로 같아서, 밤새 비가 내렸는데도 몹시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