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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서한

[팬픽션] 푸른 강가 누우니 어느덧 해는 저물고 5 (완결)

저자 : 花楚
원문 : http://linegoe.lofter.com/post/2d359d_90516c0










어린 불릉은 총명하고 유순한 아이였다. 제 고명대신들과도 가까워 광 대부, 김 대부, 양 대부 따위로 부르고는 했다.

맞는 호칭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어른들은 모두 웃었다.

그러다 상홍양이 문득 물었다. 김 장군은 본래 성이 뭐였소?

김일제는 고개를 저으며 잊어버렸습니다, 하고 말했다. 본래 김씨였던 것처럼.





다들 안간힘을 다해 숨겼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린 불릉은 기어이 알아차리고 말았다. 제 어머니, 그 아름답고 따스하던 젊은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불릉은 이유 없이 신경질을 내다 밤새도록 울기 시작했으며, 조금만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크게 화를 냈다. 그러다 결국은 어가를 모시고 호숫가로 놀러 나간 길에 아무 조짐도 없이 갑작스레 울어 젖히고 말았다.

늙은 황제는 눈썹을 찌푸리고 우울한 시선으로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벌벌 떠는 유모가 아이를 제 부드럽고 따스한 가슴팍에 껴안은 채 두 번 세 번 달래고 얼렀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얼음 같은 침묵 속에서 아이가 째지는 소리로 제 어미를 찾는 부르짖음만 울렸다.

폐하, 황자가 아직 나이 어려…….

마음 쓰지 말고 울게 놔 둬라. 아이가 어미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냐.

늙은 황제가 분노한 것은 명백했으나, 아무런 꾸지람도 처벌도 없었다. 원림 안의 사람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몰랐다.

저게 무슨 말씀일까요? 김일제는 울며불며 발버둥치는 어린 황자를 안아들고 난감해 했다.

상홍양이 기묘하게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아이들이란, 며칠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는 법이지.





그 무렵 공손하 일가는 이미 멸족당했고 양석과 제읍 두 공주는 액정에 연금되어 있었다.

사월에는 위청과 곽선의 기일이 연이어 있었다. 곽광은 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간소한 포의 차림을 하고 홀로 무릉을 향했다. 곽선에게는 연궁을 하나 주고 어린 곽우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위청의 묘에는 독한 술을 한 병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처에 기거하며 묘를 지키는 집안 사람이 말하기를 이른 아침에 위항 역시 다녀갔다고 했다. 굳이 오래도록 머무르는 것이 아마 곽광을 기다리는 듯했으나 나중에는 그냥 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지 않아 위항 역시 죄를 얻어 주살당했다. 창졸간에 남긴 것은 두 마디의 부탁 뿐이었다. 나는 비록 죽으나 아우들은 평안하기를 바란다. 혹 보전할 수 없다면 구천에 계신 아버님을 욕되게 하지 마라.

황제는 침묵한 채, 간신들이 제 아들딸에게 입에 담지 못할 각종 죄목을 덮어씌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황후 역시 침묵한 채, 특유의 온화하고 고분한 자세로 운명의 무상함에 맞섰다.

위장공주가 봉읍에서 장안으로 달려왔다. 한때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소녀였던 그는 이제 나이 든 과부가 되어 있었다. 그의 두 번째 남편 난대는 요참을 당해 죽었고 외아들 조종은 궁인과 더러운 짓을 저질렀다는 모함을 받아 구금되었다. 그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홀로 왔다. 간단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아무 장신구도 달지 않았으며 몸에는 칙칙하고 어두운 빛의 붉은 포를 걸친 채, 곧장 길을 질러 황제의 침궁으로 향했다.

당연히 황제는 문을 닫은 채 만나 주지 않았다. 공주는 사월의 봄비에 치맛자락이 시커멓게 젖어들 때까지 계단 아래 꿇어 앉아 있었다. 계단참의 시위들이 날카로운 칼을 뽑아들고 그를 쫓아 보내려 했다.

그는 화를 눌러 참고, 일찍이 미앙궁의 여자들이 한 번도 내 보지 못했을 높고 큰 소리로 말했다. 부황, 저희 자매가 불초하여 부황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몸을 일으켜 떠나갔다.

궁문이 활짝 열렸다. 문턱 너머의 황제가 가쁘게 부르짖었다. 빨리, 빨리 멈춰 세워라. 당장 가서 이리 돌아오라고 해. 그러나 궁궐의 그 수많은 문턱과 난간도 공주의 걸음을 멈춰 세우지 못했고, 그 후에 거세게 불어 닥친 비바람 역시 멈추지 못했다.

양석과 제읍이 죽었고 조종 역시 죽었다. 위씨 성을 가진 자들, 위가와 연관이 있는 자들 거의 모두가 죽어 없어졌다.

그리고 황제는 건장궁으로 가서 사냥을 하겠다고 말했다.

성지는 갑작스럽고도 급박했다. 황제는 일 각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당장 장안에서 도망쳐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곽광은 성지를 받들어 어가를 수행하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밤 그는 변장하고 유거를 찾았다. 후미지고 깊숙한 궁실은 비어 있었다. 어둑한 등과 반쯤 식은 술 뿐이었다.

유거는 빙그레 웃었다. 아광, 오랜만이군. 아는지 모르겠지만 진아進兒가 이제 애 아버지가 될 거야. 네가 건장궁에서 돌아오는 가을 무렵이면 태어나겠지.

곽광은 몸을 숙여 술을 따르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나이가 들어 소년 시절처럼 수려하지는 않았다. 거칠고 푸석해진 손에서 세월이 드러났고 나이가 더 많은 곽광은 약간 주름도 생겨 있었다. 그러나 손을 움켜쥐는 그 힘은 유거의 뼛속에 새겨지는 듯했다.

전하, 어찌하시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죽더라도 전하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곽광은 황제를 모시는 내조의 근신으로 명성은 높았으나 실권은 없었다. 궁을 들고날 때 약간 편의를 봐 주는 정도가 가진 권한의 전부였다. 어떤 방법으로 죽음을 무릅쓰겠다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급박하게 떠나는 행차였고 명망 있던 장군들은 대부분 멸족당하여 호위대의 군심은 요동치고 있었다. 사단이 나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거를 옹립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곽광은 그저 더는 이렇게 살아갈 수 없었을 뿐이었다. 친족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고, 구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유거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부황은 적을 필요로 하실 뿐이다. 허나 나는 부황의 적이 될 수는 없어. 위씨 집안의 흥성은 대장군과 표기장군의 무용에 기댄 것이었지. 삼촌과 거병 형님의 적은 오랑캐들이었지만 황제의 적은 곧잘 나라의 공신과 스스로의 혈족이기도 하다. 나는 부황이 그렇게 괴로워하시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그리고 나 자신 역시, 그렇게 고독한 제왕은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아광,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자세한 이야기는 가을에 돌아오면 다시 하도록 하자.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것이 마지막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훗날 유거는 호현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마을 사람들은 추격병이 시신에 욕을 보일까 두려워 그대로 묻어 버렸다. 묻힌 땅은 옛날 황제가 호랑이를 쏘고 병에 걸렸던 곳과 고작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임종 전 그는 서신을 한 통 남겨 문객에게 보관하도록 했었다. 서신에서 그는 여전히 황제에게 가혹한 옥사를 그만두고 방사들을 멀리할 것을 간언하고 있었다. 강충의 무리가 혹세무민하여 이름을 얻었다고 죄목을 나열했으며, 자신이 군을 일으킨 것은 반역하려 함이 아니라 그저 간신의 손에 더러운 이름을 쓴 채 죽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그러나 그 문객은 황제를 만나기도 전에 참형을 당했다. 서신과 갓 태어난 황증손 모두 곽광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곽광은 서신을 그저 훑듯이 한 번 읽어 보고는 그대로 태웠다. 사람은 죽었고 남은 것은 한 무더기 백골과 구더기 뿐이다. 결백한지 아닌지 구태여 다시 말할 것이 없었다. 황제가 이 서신을 믿지 않는다면 태자는 더 많은 죄를 뒤집어쓰게 될 터였다. 혹은, 만일 황제가 믿는다면, 그의 회한과 고통을 달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이 필요하겠는가.

곽광은 아이의 이름을 병이病已로 지었다. 그는 그저 이 모든 비바람이 속히 끝나기만을 바랐다.





오래지 않아 아기 병이는 미앙궁 옆의 군저옥에 갇히게 되었다.

늙은 황제가 한 번 그를 보러 간 일이 있었다. 황제는 두 궁궐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위에 멀리 서서 굽어보았다.

병이라니, 이름이 왜 그렇지?

폐하, 제가 지은 이름입니다. 평안하기를 바랐습니다.

황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무식하기는. 병이 끝난다(病已), 병을 물리친다(去病), 매일 그렇게 불러대다가는 없던 병도 불러오지 않겠는가? 나이는 얼마나 되었지? 불릉과 비슷해 보이는데.

수십 길 아래 진흙탕에서 놀고 있는 아이는 아득히 멀어 알아보기도 어려웠으나 황제는 한참이나 응시했다. 깊은 눈빛에는 소름끼치는 데가 있었다.

상세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아이를 찾았을 때 아직 사 양제가 매어 준 끈팔찌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정화 이년 단오 무렵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황제는 어린 불릉의 황위를 위해 곁가지 같은 이 아이를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해를 입에 담자 황제의 눈빛은 뚜렷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잠시 보다가, 결국은 지팡이를 탁 탁 짚으며 천천히 가 버렸다.

훗날 유병이는 풀려나 사씨 집안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유거의 시신은 그대로 호현에 남아 있었다.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고 사당도 지어지지 않았다. 마치 촌 농부처럼 한 줌 누런 흙이 해골을 가렸을 뿐, 성명이 적힌 비석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초목이 봄을 맞아 다시금 푸르러지자 헐벗은 흙더미는 잡초에 가려 찾아보기도 어려워졌다. 텅텅 빈 사자궁의 혼을 부른다는 향 연기만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배반하여 흉노에 투항했던 이광리가 부귀를 얼마 누리지도 못한 채 고록고狐鹿姑 선우에게 참수당해 제물로 바쳐졌다는 소식이 왔다.

보름 후 그의 외조카 창읍왕 유박은 두려움 속에서 급환으로 죽었다.

늙은 황제는 감천궁으로 가서 이 부인의 초상화를 꺼냈다. 방사들이 밤낮으로 혼을 불렀다. 그러나 비단을 아무리 태워대도 그저 혼탁한 연기 뿐, 북녘 미인의 모습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홍양이 간언했다. 흉노가 오손을 공격하였고 해우공주가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습니다. 한군은 응당 윤대에 주둔하여 흉노에 맞서야 합니다.

늙은 황제는 딴생각을 하며 듣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흐릿하게 물었다. 윤대는 황량한 땅이 아닌가.





서역에 대한 한 사람들의 지식은 장건에게서 온 것이었다. 점점이 핏자국 어린 그의 두 발이 서쪽으로 가는 길의 거리를 재었고, 천 갈래로 찢어진 그의 입술이 끝없는 사막을 지나면 똑같이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겪는 작은 나라들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장건이 다녀온 후에야 조공을 바치는 서역의 사절들이 국서며 투항서를 들고 왔고, 상단들은 이역의 느낌 물씬한 음악과 술을 장안으로 잔뜩 보내 왔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이란 좋은 술과 미희의 가무처럼 태평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무렵 한과 흉노는 해를 이어 싸우는 중이었다. 사신들은 왕왕 선명한 군사적 의도를 띠고 나라 밖으로 나섰다. 장건 본인 역시 겉으로는 관대하고 겸손했으나 사실은 퍽 호전적이고 무를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원수 이년 하서에서 대승을 거두어 혼야왕이 귀순하자 그는 부랴부랴 위부로 달려왔다. 제 집에서 빚은 마유주와 포도주를 한 단지씩 끼고는, 표기장군의 공을 경하하러 왔다면서 며칠이나 미적대고 가지 않았다.

이미 초겨울이었다. 드문드문 떨어지는 빗방울에 눈이 섞여 내렸다. 위청과 곽거병, 장건은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에는 양가죽 수십 장을 이어 만든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었다. 두루마리에 그려진 것은 한의 변경과 마주한 여러 번방들이었다, 어딘가는 산수며 지형이 상세히 나타나 있었고 어딘가는 그저 윤곽 뿐이었다. 그리고 수십 장의 양피지 조각들이 더 있었다. 하서 전투에 종군했던 군관들이 찾아낸 길과 포로들의 진술을 적어둔 것으로 그 흩어진 그림들도 이제 한 장의 지도 위에 모이게 될 것이었다.

위청이 성지를 받들어 부를 열었으므로 원칙대로라면 한군의 일상 군무는 모두 대장군부에서 관할할 터였다. 그러나 그는 붕당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부의 관리들과 십분 거리를 두고 모든 일을 규정대로만 처리했다. 황제가 외조를 멀리했으므로 명은 왕왕 내조에서 나왔고 내조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군 지휘관이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었다. 그러니 대한의 군사 정책은 위부에서 시작되어 미앙에서 결정되는 셈이었다.

하인들은 다들 눈치가 있어 손님을 보자 창과 문을 닫아걸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곽광만이 시동처럼 들락거리며 심부름을 했다. 방 안은 등잔을 가득 밝히고 화로까지 몇 개나 피워 두어 몹시 따뜻했다. 젊은 곽거병은 더위를 타서 얇은 윗도리 한 겹만 남긴 채 벗고서도 목이 탄다고 투덜거렸다. 우람하고 떡 벌어진 체구의 장건도 오래지 않아 겉옷으로 엷은 땀이 배어났다. 위청만은 오랜 단짝 같은 여우털 모피를 두른 채 촉 땅의 산초를 끓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막 이야기가 활발해지려는 참에 집사가 장검을 한 자루 받쳐 들고 왔다. 대장군을 만나려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이름은 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위씨 가문은 많은 호걸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상인도 있었고 도적도 있었으며 협객도 있었다. 머무는 곳 없이 사방을 쏘다니며 기밀과 정보를 빼내는 데 능했으나, 법도에서 용납되지 않는 일도 곧잘 행하던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은 성명을 대지 않고 검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첫째는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날붙이를 건넴으로써 우호의 뜻을 전하는 것이었다.

검을 잠시 바라보던 위청이 말했다. 두 분도 얼른 준비하셔야겠소. 나는……. 그는 집사를 한 번 바라보더니 말을 바꿨다. 어서 문을 열고 손님을 이리로 모셔라.

황제는 편복 차림으로 따르는 시위도 없이 제 손으로 우산을 들고 걸어왔다. 방 안의 사람들은 진작 예복을 갖추어 입고 문간에 서 있었으면서도 황공한 표정들을 하고서 눈보라를 무릅쓰고 뜰 한가운데로 뛰쳐나와 엎드리려 했다.

신들이 폐하의 왕림을 나아가 맞이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ㅡ

됐다. 괜히 예의 차리지 말고 어서 들어가지.

황제는 장건과 위청의 팔짱을 꼈다. 곽거병도 멍하니 있다가 그대로 일어섰다. 곽광만 남아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있느라 빗물에 반 넘어 몸이 젖었다.

조회만 끝났다 하면 보이지를 않더라니. 자숙(子叔, 공손하의 자)은 거짓말도 제대로 못 하더군. 무슨 대장군은 또 고질병이 도졌고, 표기는 집에서 간병을 하고 있다나! 다들 집에 틀어박혀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남표후처럼 착실한 사람을 신이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 위청의 대답은 눈을 훑어 내리는 봄바람 같았다.

황제가 벗어 내린 도롱이를 받아든 장건이 곽광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맹, 가서 여기 향을 쐬어 두어라.

어디, 머리를 맞대고 주물럭거리던 것을 짐에게도 한 번 말해 봐라.

예, 폐하. 하서의 싸움에서 항복한 적군이 매우 많은데 서쪽의 길과 산천에 대한 진술의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신은 궁금한 마음에 박망후를 청해 가르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명확해졌는가?

대체로는 그러하나, 아직 몇 군데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황제와 위청, 장건은 의논을 시작했다. 곽거병은 말없이 한 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들이 말하는 대로 정신을 집중하여 지도 위에 선을 그려 나갔다. 언변이 좋은 장건은 누렇게 마른 모래사막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해 냈다. 잠시 후에는 위청과 황제 모두 입을 다물고 그의 이야기를 흥미진진 듣고만 있게 되었다. 곽거병은 춤추며 날아다니는 장건의 언어들을 붓끝에 붙잡아 알맞은 모양새로 그려 냈다.

박망후, 표기의 그림 솜씨가 어떤가? 황제가 조금쯤은 자랑스러운 투로 물었다.

표기장군의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입니다. 신은 직접 가 본 길이지만 저렇게 똑똑히 그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박망후를 따라다니는 길잡이 노릇이나 시켜 볼까?

장건은 황제의 말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읽어냈다.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농담하듯 말했다. 이렇게 존귀한 길잡이를 부릴 수 있는 분은 폐하뿐이지요.

황제는 흡족스레 웃었다. 방 안 가득한 온기와 취흥 너머로 날카로운 탐욕이 아른아른 숨어 있는 듯했다. 그는 신비의 땅이었던 곳들이 곽거병의 붓 아래 천천히 선명해져 가는 것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만족스러운 침묵 속에서 위청도 다소 긴장이 풀렸다. 그는 반 넘어 식은 잔을 내려 놓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다시금 소리도 없이 거두어 들였다. 황제가 흘끔 보더니 그릇을 받쳐 들어 냄새를 맡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추워서 마시는 것인가?

예. 옛날부터 쓰던 처방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돌렸다. 중경, 이 지도는 어디에서 난 것인가. 북쪽의 몇 군데는 궁중의 지도와 형태가 다른데.

폐하께서 제대로 보셨습니다. 흉노는 물과 초목이 있는 곳을 따라 움직이며 그 위치는 해마다 눈비가 내리는 양에 따라 달라집니다. 신이 몇 군데 추측으로 가필한 곳이 있는데 제대로 고쳐졌는지 박망후에게 물어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위청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무언가를 찾는 듯도 하고 기대하는 듯도 한, 소리 없는 힐문 같은 눈이었다. 위청은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숙이고 꿇어 앉아 있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곽거병이 붓을 멈추고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황제가 한 발 빨랐다. 거병, 잘 봐둬라. 진정 싸움에 능한 자는 혁혁한 공이 없는 법이다. 네가 이 말을 배워 깨치면 진정 네 외삼촌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일 년 뒤, 다시금 사절로 서역을 방문한 장건이 각 나라들과 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위청과 곽거병은 각 오만의 정병을 이끌고 두 갈래 길로 막북을 들이쳤다. 한실은 흉노라는 우환을 단번에 끊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곽거병이 처음으로 전쟁 하나를 기획하는 전 과정에 참여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젊은 그는 오만하고 괴팍한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총지휘관이었으나 다른 장군들과 한바탕 벌인 뒤로 왕래를 끊고 결국은 위청에게 시원스레 전부 미뤄 버렸다. 그는 비장 한 명도 남기지 않고 홀로 오만의 기병을 이끌어 울타리를 넘는 야생마처럼 장성에서 곧장 북으로 내달았다.

집에서 송별연을 열었을 때 술에 취한 조파노가 농담처럼 투덜거렸다. 표요교위 때와 달라지신 게 없잖습니까. 그냥 데리고 가는 사람이 좀 많아진 정도지요.

그 지도는 궁으로 보내져 황제의 서재에 걸렸는데 평소에는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곽광은 그 가림막을 건드린 흔적이 보일 때마다 전선에서 첩보가 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고, 이겼을지 졌을지 혼자 추측해 보곤 했다.

한 번은 그 앞에 멍하니 섰는데 황제가 소리 없이 뒤에 다가와 있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형은 난후산에 있다.

곽광은 화들짝 놀랐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황제는 들은 체 만 체 가림막을 걷어 올리고는 지도 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어디인지 아느냐. 여기다.

곽광은 주저하며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도 위의 형상들은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고, 위안이나 안도감은 더더욱 주지 못했다.

옛날 네 형도 여기로 달려와 짐에게 대장군이 어디서 싸우고 있는지 보여 달라고 조르고는 했었지. 음, 딱 너만 했을 것이다. 매일 와서 보며 아무리 혼을 내도 안 가더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두 눈에서 가벼운 빛이 반짝였다. 십여 년 동안 전쟁이 이어지면서 조정은 거액의 지출을 감당하는 한편 넓어진 국토를 공고히 해야 했다. 이 지고한 군주는 언제나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이상으로 바빴으며 격노와 흥분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런 반면 전대미문의 공적을 향한 기대를 가슴 가득 품고 있기도 했다.

짐은 거짓말을 했지. 말을 빨리 달릴 수 있게 되면 사막에 보내주마, 강궁을 둥글도록 당길 수 있게 되면 사막에 보내주마, 하고.

황제는 침울해 보였다. 그러나 그 근심 중 친자식처럼 아끼는 곽거병에 관한 것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고심하며 쌓아 올린 한실의 백 년 기반이 혹여 패전으로 무너질까, 자신이 꿈꿔 온 천 년의 영예가 사라질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감정 같은 것은 없다. 그 안에는 언제나 이기적 욕망과 어쩔 수 없는 부담감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윤대를 지켜야 합니다. 상홍양은 결연했다. 그는 많은 중신들을 끌어들여 연명 상소를 올렸다.

상홍양은 수년 동안 세금과 부역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해 왔다. 남들은 온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며 그를 무시하기도 했다. 얼마 전 황제가 그를 탁고대신으로 삼겠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쳤으므로, 자신이 군국대사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더욱 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추진해 온 염철과 균수 정책은 본래 전선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이 멈춘다면 그 역시 쓰일 곳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늙은 황제는 망설였다. 윤대는 황량한 땅이 아닌가.

십오 년 동안 장군들의 절반은 태자의 난으로 죽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광리의 출정에서 죽었다. 조정은 병량과 군마를 갖추었고 공전절후의 강토를 넓혔으나, 산하를 아우를 지휘관도 만 리를 내달릴 장수도 찾아내지 못했다.

누가 있어 나가서 싸울 것인가?

밝은 등불 아래 밤새도록 홀로 앉아, 늙은 황제는 고심했다.

날이 밝을 무렵 곽광은 부름을 받고 입궁했다.

광록대부, 짐을 도와 조서를 쓰라.

어린 불릉이 방글방글 웃으며 황제와 함께 아침을 먹고 있었다.

늙은 황제는 글솜씨가 좋아 한 글자도 덧붙이지 않고 단번에 내용을 불렀다.

가혹하고 포악한 짓을 금하고, 함부로 세금 거두는 것을 멈추며, 전쟁을 그만두어 병사들을 쉬게 하고, 백성을 풍족하게 키우고자 한다.

그가 묘사하는 정경은 흡사 옛 문경의 치세 같기도 했고, 혹은 유거가 평생 동경하던 태평성세 같기도 했다. 글을 써내려 가는 동안 곽광의 손바닥에서 줄곧 땀이 배어나와 죽간에 떨어졌다. 소매를 당겨 손을 닦으려는데 늙은 황제가 웃으며 물었다. 광록대부는 왜 붓을 멈추는가. 짐에게 간언할 말이라도 있는가?

곽광은 잠시 멈칫했다가 방금 잠에서 깬 사람마냥 엎드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폐하,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신은 탄복할 따름입니다.

늙은 황제는 유불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부황의 조령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느냐?

어린 불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헤헤 웃으며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늙은 황제는 화내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잘 기억해 두어라. 나라의 큰 일은 오로지 제사와 군사이다. 앞으로 천천히 깨우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곽광을 보았다. 늙고 혼탁한 두 눈에 은은히 원통한 기색이 묻어났다. 하늘이 그에게 남겨 준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린 아들의 안위를 지켜주기에도 부족했고 한실을 위해 뛰어난 성군을 키워내기에도 모자랐다. 패주하는 적을 쫓듯 온 천하를 휩쓸겠다는 큰 꿈은 이제 막연한 미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정월 초하루에 늙은 황제는 천하의 유씨 왕들을 모두 불러 온천궁에서 연회를 열고, 다시금 그들이 우림군의 ‘호송’ 하에 경기를 떠나 봉지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월에 어가는 오작궁으로 향했다가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잠시 풀렸다 다시 싸늘해진 초봄 날씨가 하룻밤 사이 길 위의 눈을 모조리 얼려 수레가 굴러가지 않았다.

늙은 황제의 병은 나날이 무거워져서 기침으로 밤을 지새웠다. 유불릉은 반쯤 억지로 효자 노릇을 하느라고 밤낮으로 침상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는 어려서 아직 삶과 죽음을 잘 몰랐으나 곁의 사람들이 초조해 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에 말려들었다. 아이는 곽광의 품에 들러붙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숙위를 맡은 김일제가 위로했다. 폐하, 반나절만 더 계시면 됩니다. 얼음이 녹거든 장안으로 돌아가시지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이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서로가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곽광은 유불릉의 손을 잡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말소리는 무거웠다. 신을 용서하십시오. 만약의 일이 있은 뒤에는 누구를 후사로 세워야 하겠습니까?

늙은 황제는 기침을 눌러 참으며 오래도록 곽광을 응시했다.

처음으로 단 한 번, 곽광은 평생의 담력을 다 끌어 모아 고개를 들고 위엄 있는 제왕의 눈빛을 마주보았다. 위청도 곽거병도 죽었다. 유철도 이제 곧 죽을 것이다. 이제 그가 의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등 뒤에는 호시탐탐 제위를 노리는 유씨 종친들과 아무 방책도 없는 유불릉이 있을 뿐이었다.

곽광, 가서, 암녹색 비단, 그…….

늙은 황제는 맞은편을 가리켰다. 금궁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손바닥 보듯 환한 곽광은 서가의 붉게 칠한 목갑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위청이 세상을 떠났을 때 황제는 장안 밖을 순시하며 제사를 올리던 중이었다. 몇 달이 지난 뒤에야 환궁할 수 있었고 왔을 때는 이미 무릉 곁의 봉분이 여산처럼 쌓인 다음이었다.

어심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어서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황제 역시 위청이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굴었다. 궁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색색깔의 비단이 드리워져 있었다.

평양공주가 입궁할 때까지 그랬다. 공주의 몸에 두른 상복도 묶어 내린 긴 머리칼도 모두 눈처럼 희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옅은 화장기가 있었고 눈물을 흘린 흔적도 없었다. 말소리도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폐하, 대장군이 떠나기 전 신첩에게 인신을 맡겼습니다.

중경이...... 남긴 말은 없습니까?

별 말은 없었습니다. 바깥일이나 집안일은 모두 안배해 둔 바가 있으나 인신만은 남의 손에 맡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본래 폐하께서 행행에서 돌아오시면 직접 전해 드리고자 하였으나 하늘이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신첩이 지니고 있다가 폐하께 직접 돌려 드려야 한다고 두 번 세 번씩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암녹빛의 비단 주머니는 제법 묵직했다. 황제는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손 안에 떨궜다. 인장 대여섯 개와 호부 일고여덟 개가 손바닥에 가득 찼다. 황제는 그것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다시 주머니 안에 털어 넣으며 냉소했다. 짐이 이것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죽은 대장군의 영예가 될 터이니 함께 묻도록 하지요.

폐하, 이미 장사를 지낸 지 한 달이 넘었고 묘실도 모두 봉해 놓았습니다. 몇 가지 물건을 더 넣자고 무덤을 팔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화가 났으나 큰누님에게 그것을 풀 수는 없었다. 그대로 주머니 입구를 묶어 한 켠에 버려 두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곽광은 그 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열어라.

예.

십여 년을 건드리지 않은 매듭 위에는 잿빛으로 먼지가 덮여, 꽤 힘을 들이고야 풀 수 있었다.

황제는 인신들을 하나하나 꺼내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목구멍 안에서 뭔가 웅얼거리는 것이 새겨진 글자들을 입속으로 읽어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작은 인장 하나를 들고 등불 아래 몇 번이나 자세히 비추어 보더니 손 안에 꽉 쥐었다. 나머지는 모두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 곽광에게 건네졌다.

곽광을 대사마 대장군으로 봉한다. 붕한 뒤에는 어린 아들을 세워 주공의 일을 행하라.





밤이 지나고 곧 날이 밝을 무렵이었다. 늙은 황제는 그제야 간신히 잠이 들었고 신하들은 소리 없이 물러났다. 비단 주머니는 여전히 곽광의 품에 들어 있었다. 그는 두려워서 그것을 열어 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이름 역시 사라진다. 신하의 인신은 황제의 옥새처럼 대를 이어 물려 쓸 수 없는 것이었다. 황제가 인신들을 내린 것은 이를 거울삼으라는 뜻일 터였다.

처소로 돌아온 그는 홀로 책상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많은 것을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문득 밖에서 환관이 날카롭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군, 대장군!

누구? 누구를 부르는 것이지?

대장군, 폐하가 깨어나셨습니다. 대장군을 급히 찾으십니다.

곽광은 정신을 추스르고 다급히 몸을 일으켜 뛰쳐나갔다. 그를 본 문지기가 낭랑한 목소리로 도착을 알렸다. 대사마 대장군이 들었습니다!

황제는 눈을 뜨고 곽광을 바라보았으나 그 눈빛은 그의 어깨 너머 머나먼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곽광에게 한 손을 내뻗으려 했다. 곽광은 즉각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감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침상 곁의 유불릉이 늙은 황제의 손을 부여잡고 연신 말을 걸었다. 부황, 대장군이 왔어요. 바로 저기 서 있습니다.

늙은 황제는 흐느끼듯 대답하느라 두 번이나 목이 메었다. 유불릉의 얼굴로 향하던 손이 공중에서 붙들린 듯 멈췄다.

생명을 잃은 육신이 침상 위로 늘어지며 줄곧 이불로 덮여 있던 손이 미끄러져 나왔다. 움켜쥔 손이 서서히 열리면서 위청이 쓰던 검은 돌로 만든 작은 인장이 땅 위로 떨어져 두 동강 났다. 오래된 봉니가 체열로 달궈져, 늙은 황제의 손바닥에는 옅은 붉은빛의 청靑 자가 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