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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아희환니(2020)

《아희환니》 [팬픽션] 한 올 남김없이


중국 蓝茵님의 드라마 아희환니 팬픽션입니다. 21화까지의 내용을 포함하며 커플은 로정X로진. 한국어 번역 게재를 허락받은 글로, 타처 전재는 삼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칼만이 너의 밥줄이 되리라. 너는 아우를 섬겨야 할 몸, 너 스스로 힘을 길러 그가 씌워준 멍에를 목에서 떨쳐버려야 하리라.”


01.
소해는 근래 들어 대단히 빠르게 발전해 왔다. 로정이 떠날 무렵 이 도시는 아직 학생에 불과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새 건축의 출현으로 수많은 옛 골목이 사라졌다. 변함없어 보이는 것들마저 남모르게 주인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병으로 위중했다. 그를 태울 차가 공항까지 나와 있었다. 자동차는 번개처럼 빠르게 도시의 간선도로를 달린 끝에 교차로에서 신호에 걸렸다. 로정과 비슷한 나이의 기사가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길가 빌딩을 가리켰다. “정홍그룹 중국 본사 건물이랍니다. 아주 거창하죠.”
로정은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라서 웃었다. “거창해요? 난 모르겠는데.” 전화기를 몇 번이나 바꿨지만, 그는 아직도 로진이 쓰지 않은 지 오래된 옛 번호를 저장하고 있었다. 정홍그룹 건물 아래서 로정은 새 문자를 보냈다. 정홍 본사 건물만 보면 형이 소해에 쭉 있었던 것 같네. 떠난 적이 없는 줄 알겠어. 유리 외벽? 그거 엄청나게 싫어했잖아.


02.
로진의 오른쪽 귀 뒤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열여덟 살 때 생긴 것이다.
유학을 떠난 지 벌써 몇 년 지난 뒤였다. 동창들은 고등학생 생활을 마무리하느라 급했다. 마침 귀국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동창회 행정 사무 대부분은 그의 몫이 되었다. 어느 날 오후, 로진은 선생님께 드릴 기념품을 사러 소해 최대 쇼핑몰에 들렀다. 내로라하는 도시는 하나같이 유리 외벽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오피스 빌딩이나 복합 쇼핑몰이나 온통 유리로 되어 있었다.
막 정문으로 들어가려는데 문간에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아주 점잖고 비싸 보이는 정장 차림으로 바닥에 엎드려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로진은 아이의 새하얀 소맷부리에 온통 먼지가 묻은 것을 보았다.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비켜서 지나갈 뿐, 아이를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아이를 본 순간 로진은 옛날 자신을 떠올렸다. 그는 쇼핑몰 입구에 멍하니 멈췄다. 자리를 비운 보호자 대신 잠시나마 아이를 보고 있어야 하나 싶었다.
아이는 그와 자연스레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놀다 말고 고개를 들더니 그를 보며 웃었다. 한창 이갈이를 하느라 작은 앞니가 두 개 없었다. 로진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 막 그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데 갑자기 쇼핑몰 이 층의 유리 외벽이 팅 하고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날카로운 비명 속에서, 문간에 선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로진을 향해 찬란하게 활짝 웃고 있었다.
로진은 달려들었다. 아이의 허리를 안은 채 땅바닥으로 엎어져 몇 바퀴나 굴렀다. 와장창 챙그랑 소리가 등 뒤로 가득해졌고 장난감 자동차는 박살이 났다.
그는 제 품에서 아이를 끄집어냈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어서 유리 조각이 가득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구잡이로 털며 계속 물었다. “다치지 않았니? 아픈 데 없어?”
아이는 잡아 터는 대로 멍하니 있다가, 새까맣고 윤이 도는 커다란 눈으로 그를 보더니 와앙 하고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로진은 더욱 당황해서 얼른 물었다. “어디가 아파? 형한테 말해 봐.”
아이의 따끈하고 보드라운 손이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손바닥이 온 힘을 다해 귀 뒤를 누르고 있었다. “형아 다쳤어. 흑…… 피 많이 나…….”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그제야 자기 귀 뒤에 상처가 난 것을 의식했다. 피가 옷깃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로진은 아이를 안아 들고 옷의 먼지를 털어 주며 부드럽게 물었다. “괜찮아. 어른 안 계셔? 형이 아빠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아이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상처에다 호호 입김을 불었다. “안 아프다, 안 아프다…….” 로진은 아이를 흔들었다. “얼른, 어른 어디 계셔?”
아이가 웅얼거렸다. “엄마가 아빠 생일 케이크를 샀어. 기사 아저씨가 케이크를 가지러 갔어. 여기서 기다리랬어.”
“간 지 얼마나 됐어?”
아이가 막 손가락을 꼽으며 세어 보려는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작은 도련님! 괜찮으세요?”
로진은 돌아섰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화려하고 커다란 케이크 상자를 든 채 뛰어오고 있었다.
“저 아저씨야?” 아이에게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한 얼굴로 어린 도련님이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로진이 말했다. “외상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 보세요. 안으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로진은 아이를 기사에게 넘기려 했으나, 작은 아이의 두 팔이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 돼. 형아는 나랑 같이 병원에 가야 해.”
로진이 웃었다. “형은 괜찮아. 이따 혼자 가면 돼.” 아이가 고집을 부렸다. “안 돼. 나랑 같이 가야 해!”
어린 나이인데도 한껏 귀염만 받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이만 할 때는 버릇없이 굴어도 귀여워 보이는 법이다. 로진은 일순 어쩔 줄을 몰랐다. 옆에서 기사가 권했다. “방금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그냥 가시면 저희로서도 죄송하니까요. 같이 병원에 가 보시죠.”
그는 별 도리가 없어서 그대로 아이를 안은 채 기사를 따라 주차장까지 걸었다. 예닐곱 살의 남자아이는 퍽 무거워서, 계속 안고 가려니 나중에는 좀 힘에 부쳤다. 기사가 받아들려 했지만 아이는 로진을 꼭 끌어안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로진은 차에 앉아서야 한숨 돌렸다. 아이는 뒷자리 콘솔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했다. 작은 손바닥을 펼치자 파랗고 하얀 포장지가 반짝이며 빛났다. 퍽 먹음직스러운 사탕이었다. “형아, 사탕 먹어.”
기사가 룸미러로 보더니 웃었다. “도련님이 아주 좋아하시는 사탕이에요. 사장님 사모님이 달라고 하셔도 안 주시던 건데.”
아이는 함박 웃으며 로진에게 사탕을 건넸다. “형아, 먹어 봐.”


03.
당연히 문자에는 답이 오지 않았다. 로정은 병원 앞에서 내렸고 기사가 그를 VIP 병실로 안내했다. 이 병원은 지난 이십 년간 소해에서 가장 변화가 적은 곳일 터다. 별로 밝지 않은 등,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은 벽, 복도에 가득한 소독약 냄새까지. 단 한 번 로진과 함께 왔던 때와 똑같았다. 그때 그는 정말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아이라 부모라 해도 어쩌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날 처음 본 로진은 아주 너그럽게 그의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아이의 직감은 강렬하다. 로정은 로진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지켜줄 거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을 받쳐든 소년의 작고 마른 두 손이 떨리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그는 로진이 검사받는 동안 같이 있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피가 보여도 어지럽지 않다고, 얌전하게 무릎에만 앉아 있을 거라고 의사에게 장담했다. 의사는 로진의 상황 설명을 들으면서 그의 귀 뒤쪽 상처에서 깨진 유리 조각을 집어내더니 잔소리를 했다. “학생도 참 겁이 없네. 그렇게 큰 유리가 떨어지는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아이고, 이거 흉터가 남을 것 같은데요.”
로진은 무릎 위 아이를 안은 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이는 기분이 나빠져서 소리쳤다. “성형수술 할 때 쓰는 실로 해 주세요. 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 집에 오는 아줌마들이 쌍꺼풀 수술할 때 쓰는 건 흉터가 안 남는댔어요!”
의사와 로진 둘 다 웃었다. 의사가 말했다. “꼬마가 아는 것도 많구나.”
아이는 고개를 돌려 로진에게 약속했다. “걱정하지 마. 흉터가 남으면 내가 책임질게!”
아주 진지한 맹세였으나, 그래봐야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에게 그날 일어난 일은 너무 길었다. 상처를 봉합할 즈음 그는 로진의 무릎 위에서 잠이 들었다. 로진은 자기 귀 뒤에 영영 흉터가 남는 동안 로정의 안온한 꿈을 지켜주고 있었다.
병원 진료실 침대에서 깨어난 아이는 복도에서 누군가 높은 소리로 질책을 퍼붓는 것을 들었다. 진료실 문 너머로도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문을 열었다. 텅텅 빈 한밤의 복도에 로진이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까만 머리칼이 새하얀 붕대 위로 부드럽게 드리웠다. 빛 속에 선 그는 겁이 날 정도로 마르고 가냘파서 종잇장 같았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보였다.
로정은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무슨 수단을 부려서 로정을 구슬려 병원까지 같이 오게 했는지 몰라도, 내 말 똑똑히 잘 들어.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 모자와 로씨 집안은 실낱만 한 관계도 없어. 돌아가서 네 어머니에게 헛고생하지 말라고 전해.”


04.
다음에 보자고 인사한 사람과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로명정과 로진이 연회에서 마주쳤을 때, 로정은 난방이 지나치게 잘 되는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정원에서 대치하는 부자를 응시했다. 북풍 속 초목은 모조리 시들고 떨어졌다. 로명정의 시대는 이미 만회할 수 없을 지경으로 스러졌으나 그의 아들들은 한창 빛날 시기였고 이제 아버지의 폐허 위에서 반짝이기 시작할 것이다.
열여덟 살의 그 로진은 한 번 떠난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날카롭고 무정하게, 실체를 지닐 만큼 깊은 원한으로 로명정과 근원이 같은 제 혈육을 도려냈다.
얼마나 증오하고 원망하건 로진은 로명정의 피조물이었다. 로진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비즈니스에 임하는 그의 태도, 그가 명정그룹을 두고 걸었던 도박은 아버지를 고스란히 빼닮았다. 아이는 결혼의 인질이고 탄생은 곧 유괴의 시작이다. 로명정은 두 번째 결혼의 인질에 완전히 실망하고 나서야 그가 내버렸던 첫 번째 아이를 생각해 냈다. 로정은 아버지의 로진에 대한 기대 속에서 자랐다. 아득히 멀어 닿을 수 없는 형의 뒷모습은 그를 끊임없이 앞으로 걷도록, 동시에 번번이 잘못 딛도록 내몰았다. 아버지에게는 말한 적이 없었지만 로정이 없었더라면 로진이 곧 로정이었을 것이다. 야곱이 그의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의 축복도 빼앗아 갔던 것처럼, 잉여의 아이 하나가 로명정의 상업제국을 돌이킬 수 없는 구렁으로 밀어 넣었다.
로정은 기나긴 복도에서 로진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는 로진의 이름을 불렀다. 뜨거운 호흡이 먼지 한 점 없는 전면 유리창을 가득 덮었다. 유리창은 이 시대의 아이콘이다. 그 깨지지 않는 단단함은 혈육의 부름을 헛것으로 만들었다.
“형!”
로진은 드디어 멈췄다. 그는 돌계단 난간에 기대더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피곤으로 붉게 물든 눈매에 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깊고 무거운 옛일들의 흐릿한 물안개가 시종 흩어질 줄 몰랐다.


05.
로정은 다른 로씨 집안 사람 누구보다도 빠르게 고개 숙이는 법을 배웠다. 정홍그룹의 텅 빈 회의실에서 로진의 비서가 커피를 내주었다.
“고맙습니다.” 아마 연민이 들어 그랬는지, 비서는 곧장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입을 몇 번 열었다 다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로정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기껏 해 봐야 대단히 유감입니다, 마음 잘 추스르십시오 정도 인사치레겠지. 그간 이미 너무 많이 들었다.
당신네 로 대표에게도 그렇게 말할 건가요? 로정은 문득 그렇게 묻고 싶었다. 여기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핏줄 절반을 공유하지만 결코 동일한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결국 로정은 이렇게만 물었다. “로 대표님은 많이 바쁘신가요?”
비서가 답했다. “금방 오실 겁니다. 대표님이 내드리라고 하신 커피예요.”
로정은 정교한 본차이나 잔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블랙커피에서 시고 씁쓸한 열기가 올라왔다. 그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법이 없었다. 혈연에 기반한 추측은 모조리 헛짚은 아첨으로 바뀌었다.
회의실 구석 서가에 비즈니스 잡지가 놓여 있었다. 로정은 제일 위에 있던 것을 집어 들었다. 로진의 인터뷰가 표지였다. 기자는 온갖 어휘로 업계 거물의 두뇌와 수완을 칭찬하고, 그의 신사다운 온화함을 힘주어 강조했다.
천지의 드넓음을 알지만 푸르른 초목도 가련히 여기네. 기자는 옛 시의 글귀로 로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잡지의 주인공이 들어와 로정의 책을 덮었다.


06.
벌써 이만큼이나 컸구나. 로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는 소년을 위아래로 훑으며 옛날 그의 무릎에 앉았던 꼬마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으려 시도했다.
그에 대한 임여군의 추측은 우스운 것이었다. 로진은 명정그룹의 무엇도 갈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원한 것은 승리이지 열매가 아니었다. 그가 짊어진 멍에에서 진정 풀려나는 길은 로명정을 뛰어넘는 것뿐이었다. 열매조차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이 승리로 가는 길 위에서 으깨지고 부서져 나가는 것들에 눈길이나 줄까.
소년이 일어섰을 때 로진은 퍽 실체적인 압박감을 느꼈다. 키가 훌쩍 크고 어깨가 넓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홀로서기에는 모자랄지 몰라도 이미 다 자란 성인 남자다. 로진은 의자로 깊숙이 기댔다. 소년이 그의 손목을 위에서 내리눌렀다. 얼음처럼 찬 손끝이 느슨한 소매 속으로 파고들었다.
“부탁할게.” 로정이 말했다. “이게 형이 바라는 거라면, 나를, 아니면 어머니를 미워해. 아버지의 심혈을 무너뜨리지 마.” 어조는 간곡했지만, 정작 그의 몸은 정장과 피와 살로 이루어진 로진의 벽을 쐐기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릎이 천을 사이에 두고 바싹 맞닿으며 앙상한 골격이 힘을 겨루었다.
“형은 신처럼 무엇이든 귀 기울여 듣고 모든 것을 보고 있잖아. 독일에서 공부하다 어느 겨울날 형을 찾아간 적이 있었어. 함박눈이 가득 내리는 날이었는데 형은 정홍 본사 아래로 나오며 비서에게 우산을 씌워주었지. 차에 올라탈 때까지 그 여자는 형의 어깨 절반이 눈에 덮인 것도 모르더군. 그런 연민을, 형과 아무 상관 없는 온 세상 초목에도 쏟는 연민을 왜 혈육인 내게는 주지 않아?”
그는 로진에게로 몸을 숙이며 더욱 힘을 주어 내리눌렀다.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피가 이어진 형과 온몸을 하나 하나 맞춰갔다. 심장이 양쪽에서 똑같은 박자로 뛰었다. 그 순간은 점유보다도 완전과 더 닮아 있었다. 로정은 만족스러운 탄식을 흘렸다.
“여기였나? 그 흉터.” 그의 머리칼이 로진의 뺨을 스치고, 입술이 옛 흉터에 닿았다. “난 잊은 적 없어. 형이 잊었다면, 새로 흉터를 남겨줄 수도 있어.”
로진 아래서 의자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통제를 잃은 감각이 몹시 생소했다. 그는 로정에게 눌려 몸을 바로 펴다시피 한 채 모든 약점을 소년 앞에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로정의 낯선 숨결이 쏟아져 나와 코로, 옷깃으로, 모든 틈으로 침입했다.
“내가 오늘 한 말 기억해.” 소년이 웃었다. 뜨거운 입술과 눈물이 목덜미로 떨어졌다.
“형은 영원히 이 멍에를 벗을 수 없어. 동생이 태어난 날부터 지워진 거니까.”
그는 탁자 스위치를 눌렀다. 유리벽 위로 불투명한 블라인드가 느릿하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천지의 드넓음을 알지만 푸르른 초목도 가련히 여기네 / 已識乾坤大 猶憐草木靑
마일부馬一浮, 광이정구점曠怡亭口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