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名儿乃一时兴起님의 팬픽션을 번역했습니다. 현대 배경 AU에 진평과 장량이 나옵니다. 쓰신 분께 한국어 번역 게재를 허락받은 글로, 타처 전재는 삼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원문은 http://etoilechen.lofter.com/post/3fd2bb_1107db88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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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스솔트의 맑은 향이 짙게 퍼진 욕실에서 장량은 욕조에 누워 쉬고 있었다. 한껏 곤두섰던 신경이 욕조 속 비누거품과 함께 일렁이며 가라앉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캐리어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그는 살짝 눈을 떴으나,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손님, 이 방입니다.” 직원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방 전화가 줄곧 불통이라 장량 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만 손님이 직접 말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낯설었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확한 발음에 부드러운 말투, 나이는 청년 이상 중년 미만...... 장량은 방으로 들어온 사람에 대해 무의식중에 그렇게 정리하고는, 피어오르는 수증기 탓에 게을러지기라도 한 양 다시금 눈을 감았다.
“......실례합니다.” 채광을 위함인지 침실과 맞닿은 욕실 벽은 욕조 위부터 전부 유리창이었고 블라인드가 따로 달려 창을 가리게 되어 있었다. 본래 혼자 묵는 방이었으므로 장량은 씻으러 들어가면서도 굳이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았다. 덕분에 진평은 복도를 지나 눈을 돌리자마자 희뿌연 욕실 안의 광경을 봐 버리고 말았다.
장량은 깜짝 놀란 척 살짝 몸을 일으켰다. 말소리에 잠기운이 남아 있었다. “응? 깜박 졸았나......”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다시 물었다. “누구시죠?”
“진평이라고 합니다. 며칠 이 방을 좀 같이 쓰게 됐습니다.” 방에 들어오며 힐끗 보니 창가 쪽 침대에는 이런저런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진평은 다른 한쪽 침대에 제 짐을 정리할 참이었는데, 눈을 들자마자 목욕 중인 방 주인을 봐 버렸던 것이다. 잠시 동안 그는 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요즘 호텔들은 다 이 따위로 개방적이야?’ 하고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쌍방의 민망함이 그야말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여기 유스호스텔이었나? 아니면 요즘 국내 호텔에서는 모르는 사람과 그냥 룸을 같이 쓰게 하나 봅니다?” 장량은 눈썹을 찌푸리며 다소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시겠지만,” 진평은 어쨌거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시선 높이를 좀 맞추기로 했다. “요즘 날씨 때문에 비행기들이 전부 이 작은 동네 공항으로 비상착륙했잖습니까. 호텔마다 만원에 민박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에요. 프런트에서 합칠 수 있는 방은 다 합치는 중인데 이 방은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받질 않으셔서 직원이 그냥 데리고 온 겁니다.”
“그거 아주 잘 됐군요. 만일 제가 당신을 내쫓겠다면?” 장량의 웃음에는 냉소가 섞여 있었다.
진평은 넉살 좋게 대답했다. “인상이 워낙 좋으셔서, 그렇게는 못 하실 것 같습니다만.”
“짐 정리 마저 하시죠.” 장량은 손을 뻗어 블라인드를 내리고는, 욕조의 물을 빼고 몸에 묻은 거품을 씻어냈다.
몸매가 제법 좋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내려가는 곡선 부분이 제일 좋고, 다리는 제대로 안 보이고. 블라인드 너머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옆모습을 진평은 가만히 음미했다. 박랑사에서 여기까지 무슨 방법을 써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이번 사건의 주모자는 캐 볼 만한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을 듯했다.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진평은 현장으로 주의를 돌렸다. 혼자 쓰던 방인데도 비품들은 얌전히 상자에 담겨 있었다. 아주 신중한 사람이거나, 평소에도 깔끔하게 정리해 놓는 타입이거나.
침대에는 오늘 자 신문, 빠진 페이지가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영어가 아닌 외국어 책이 한 권, 내용은 불명이지만 아마 시간 때우기 용일 가능성이 크다. 핸드폰은 베개 옆에 있었다. 책과 같은 언어로 된 OS에 시각은 현지 시각, 호텔의 무선 WiFi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안 읽은 메시지 없음, 부재중 통화 없음. 혹시 이미 정리를 해 놨나? 두 침대 사이에 설치된 전화 수화기는 제대로 잘 놓여 있었다. 프런트에서는 왜 연결이 되지 않았을까? 아마 욕실의 전화기를 ‘실수로’ 잘못 놓았겠지. 탁자에는 생수 반 병이 남아 있었다. 다른 한 병은 방에 없는 것으로 보아 세면대 옆에 있을 터이다.
욕실의 물소리가 멎었다. 전화기를 제대로 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수건 선반 앞에 선 그림자가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하, 본인 수건만 써 버릇하던 분이시군. 장량은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더는 뒤져 볼 시간이 없다. 진평은 제 캐리어를 열어 소리 없이 빠르게 짐을 풀었다.
“죄송합니다만.” 드라이어의 웅웅대는 소리가 멎자마자 장량이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옷장 안에...... 가운 좀 가져다 주실 수 있을까요.”
아예 아무것도 안 가지고 들어갔다 이거지. 진평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옷장 앞으로 갔다. 장량의 외투는 안에 걸려 있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욕실 안에서 손 하나만 나와 재빠르게 옷을 받았다. 힘 쓰는 일을 하는 손 같지는 않고ㅡ 그 이상은 장량도 보지 못했다.
오른팔에 상처나 문신이 있는지 어떤지는 잘 보이지 않아 아직 모르겠다고, 진평은 정리했다.
진평이 아직 미니바 앞에 서 있는데 장량이 욕실 문을 열었다. 검은 머리칼은 약간 덜 마른 채였다. 살짝 긴 앞머리가 노란 조명과 어우러져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웠으나 두 눈에 서린 빛은 감춰지지 않았다. 헐겁게 띠를 묶은 가운의 여밈이 살짝 벌어져 앞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한 줄기 물방울은 머리에서 흘러내린 것인지 수증기가 맺힌 것인지 모르겠다. 진평은 가만히 침을 삼켰다. 이렇게 예쁜 사람도 범죄를 다 저지르는구나 싶었다.
“장량입니다.” 씻고 나온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진평이 순간 딴 생각에 빠진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신문사에서 일하십니까?” 서둘러서 온 듯 먼지투성이가 되어 피로한 얼굴, 그럼에도 서 있는 자세는 한창 일하는 중인 것처럼 기력이 넘쳤다. 장량은 방금 전 유리 너머로 보았던 상대의 미소를 떠올렸다. 온화하고 매력적이었으나 지금 상황에 어울리게 다듬어진 것은 아니었다. 첫만남의 민망함 탓인지 진평은 버릇처럼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ㅡ펜대를 놀리는 동작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예, 기자입니다.” 진평은 장량과 악수를 나누며 망할 회사에서 구린 작업복을 준 탓에 얼굴값도 같이 떨어진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티셔츠에 쓰인 신문사 격언을 가릴 만한 뭔가라도 찾아 붙이고 싶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꾸며내는 직업. 장량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그저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보다 사회 생활 선배시군요. 저는 유학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당신 나보다 나이 많잖아. “무슨 말씀을. 저도 세상 물정 같은 건 잘 모릅니다. 쓸데없이 먼 길로 돌며 고생이나 하는 거지요.” 진평은 그렇게 말하며 제 침대 위로 앉아 장량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창가로 다가선 장량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방금 진평이 열어 두었던 커튼을 다시 치는 것이었다. 방에 들어온 지 한참인데 커튼만 열고 조명은 하나도 켜지 않았군...... 욕실에 빛이 더 잘 들라고 한 일은 아닐 것이고. 기자란 각종 정보를 알리는 직업이다. 유동성이 크고 시의성이 중요하지만 가끔은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겠지. 장량은 커튼을 살짝 움켜쥐었다. “죄송합니다만,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서요.” 천진무구하게 웃어 보인다.
“욕실 안 쓰시면 제가 씻어도 될까요?” 진평은 캐리어를 뒤져 옷을 꺼냈다.
장량은 제 짐을 침대 가까이로 옮겼다. “편하실 대로.”
“고맙습니다.” 진평은 바닥에 던져 두었던 외투를 주워 놓고 갈아입을 옷을 받쳐든 채 욕실로 갔다.
욕실에는 아직 배스솔트의 향이 남아 있었다. 진평은 문을 잠그다 세탁물 바구니에 담긴 장량의 옷을 보았다.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남의 눈을 끌지 않고, 입고 달리기에도 편한. 바지의 다리 부분은 물에 젖어 있었다. 실수로 물이 튀었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의 흔적을 지워내려 손빨래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귀신이 울고 가겠군. 진평은 장량의 셔츠를 집어들어 목깃의 냄새를 맡아 보다가, 빙긋이 웃고는 제 옷도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샤워기의 물방울 아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면서, 진평은 제 앞에 놓인 골칫거리들을 하나씩 정리해 하수도로 떠내려 보냈다. 장량이라는 사람의 성격이나 경력 등 대강의 정보를 알아내는 한편 장량이 남으로부터 의심받는 일 역시 피해야 한다. 가끔은 장량처럼 가정 환경이 윤택한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그런 이들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닥쳐와도 결국은 어디선가 손을 빌려 길을 찾아내곤 한다. 평범한 집안 출신인 진평이 이 난세를 살아내는 방법은 오르락 내리락 떠내려 가는 제 운명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뿐이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야 많을지 모르나 어디선가 풍랑이 일어나면 그대로 뒤집혀 끝나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어찌될지 모르겠다. 진평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냈다.
정돈을 끝내고 나와 보니 방 안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장량은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소파에 웅크려 앉아 스탠드 불빛 아래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맞은편 침대에 앉던 진평은 맑은 향이 옅게 감도는 것을 눈치챘다. 방금 셔츠 깃에서 흐릿하게 맡았던 냄새는 아마 이 향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목깃에 남은 향은 아주 옅었고 재킷에서는 아예 나지 않았다. 주인이 평소 즐겨 쓰는 향이지만 그 옷을 입었을 때는 쓰지 않았던 것이리라.
진평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장량이 책에서 눈을 들었다. 부드러운 빛이 반짝이며 넘실거렸다. 진평은 살짝 아랫입술을 핥았다. “어, 외출하십니까?”
“저녁 안 드시나요.” 장량은 당연하다는 듯 반문했다.
“아, 저는......” 진평은 뒤로 팔을 뻗어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 안에 기사를 써 보내야 해서 시간이 없거든요.”
“샤워는 아주 공들여서 하시던데.” 장량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생각 정리 좀 하느라고요.” 진평은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워낙 화제라서, 잘만 쓰면 특종이 될 테니까요.”
장량이 웃었다. “요즘 같은 때에 무슨 특종이 있습니까?”
“특종을 보도한다는 게 기자에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네요!” 진평은 갑자기 흥분해서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박랑사 사건 TV에서 보셨죠?”
상대는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TV를 안 봐서요.”
“그 일 아니면 양무에 왜 이렇게 사람이 많겠습니까? 민박집들이 행여나 얽혀들까봐 장사도 다 접겠다는 판인데요.” 진평은 금방이라도 사진을 찍을 듯한 자세였다.
“그럼 기자님은 밤새도록 이 동네에 계시면서 펜대를 바쁘게 놀리셔야겠군요.” 장량은 진평의 이야기에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밤새도록 굶으시려고요?”
“오다가다 만난 사이 치고는 꽤 마음을 써 주십니다?” 진평의 어조는 약간 득의양양한 데가 있었다.
“오다가다 만난 사이라지만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을 수도 있잖습니까?” 장량은 책을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서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한 방에서 마음 놓고 잠이 오겠어요?”
“당신이 그 대사건의 주인공이라면야 얼마든지 시키시는 대로 하겠는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평은 상대의 말이 나름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장량의 진짜 목적은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인 자신을 방에 혼자 남겨두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거기다 진평 자신의 임무는 상대방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으니 식사 초대는 그의 목적에도 맞았다. “프런트에 전화해서 룸서비스가 되는지 물어보죠.” 진평은 타협적으로 말했다.
프런트에서는 민망해 하면서도 예의를 차려 말하기를, 오늘은 손님이 너무 많아 중식당이 만원이고, 만일 룸서비스를 주문하려면 대기 번호를 받아야 하며, 식당 인원이 다 정리된 뒤에야 방으로 보내드릴 수 있고...... 하지만 양식당은 비교적 손님이 적으니 혹 입맛에 괜찮으시다면 고려해 보시라는 것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장량은 그렇게 말하면서 곧장 몸을 일으켰다.
“......” 진평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가 사죠.” 장량은 옷걸이에서 재킷을 내려들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진평은 눈썹을 찡그렸다.
“거 참, 다 쓰실 수 있다니까요. 갑시다.” 장량은 문을 열었다.
“잠깐만요.” 진평은 문가에서 욕실로 꺾어 들어갔다. “가는 길에 옷이나 세탁실에다 맡기죠.” 장량이 된다 안 된다 대답하기도 전에 세탁물 바구니를 집어든 진평은 그를 끌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확실히 양식당은 사람이 들끓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역시 일손이 부족한 티가 났다. 에피타이저와 메인이 사이를 두지 않고 거의 연이어 나오다시피 하자 장량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한 마디 했다. “그냥 둘이서 4인석을 쓸 테니 여기 옆 테이블에 놔 주십시오.” 웨이터를 물린 그는 진평의 얼굴을 응시했다. 상대방은 뒤로 물러나려는 것처럼 몸을 살짝 웅크리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장량은 한 발 먼저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으음......” 진평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깐깐하면 글 쓸 때는 불편하거든요.”
“그런가요?” 장량은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고는 짐짓 물었다. “생각하고 계시는 기사 내용이 어떻길래?”
“일단 박랑사 사건이 뭔지부터 이야기해야겠군요.” 진평은 기포가 올라오는 샴페인 잔을 살짝 흔들었다. 진한 과일향이 뱃속으로 스며들자 마음이 트이면서 말문도 열렸다. “요점만 말하자면, 오늘 오전에, 어느 도로를 지나던......” 그는 공중에 선을 하나 그었다. “자동차 행렬이, 박랑사에서, 습격을 당했습니다.”
장량의 손에 들렸던 포크와 나이프가 멈췄다. “무슨 일이랍니까? 사상자도 있나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이지. 진평은 훌륭한 요리를 씹고 있는 것처럼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일순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빛냈다. “있죠.” 그러나 장량은 그의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했다. 진평은 그 눈이 해 오는 무언의 질문에 다시금 대답했다. “거물급은 아니지만.”
“아하.” 장량의 어조는 가벼웠다. 딱히 실망한 것 같지는 않다고, 진평은 생각했다.
“그럼 쓰시려는 기사는 이번 사건에 대한 분석인가요?” 장량은 빈 접시와 남은 술을 치워 달라고 웨이터를 불렀다.
“그렇죠.” 진평은 아직 식기를 놓지 않은 채였다. “만일 이게 정말 목적이 있는 테러였다면...... 목표는 아마도,” 슬쩍 몸을 기울여 상대에게 다가갔다. 향수 냄새가 또렷해진다. 진평은 거의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 사람.”
장량은 감이 안 잡힌다는 듯 눈을 살짝 굴렸다. “모르겠습니다만.”
좋아. 진평은 고개를 숙여 약간 더 거리를 좁혔다. “알고 계실 텐데요. 제일 핵심적인 인물.”
장량은 다시금 흥미를 잃은 듯 스테이크를 잘게 잘랐다. “뭔가 했더니. 가십거리 만드는 게 목적이었군요.”
“그게 무슨 소리랍니까.” 방금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던 진평은 갑자기 술맛이 뚝 떨어졌다. “사전에 준비한 테러가 분명하다니까요.”
“어째서요.” 장량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세요.” 진평은 작은 사기그릇 안에서 춤추는 촛불을 응시했다. “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 유리한 조건이 몇 개나 쌓였는지. 우선 날씨 때문에 비행기들이 여기 내리면서 이 좁은 양무는 삽시간에 사람이 몇 배나 불어났어요. 온갖 사람이 다 섞였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누가 누군지, 어디서 누구를 봤는지 기억도 안 날 테니 숨기에도 쉽죠.”
진평은 장량이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렇게 양무에 오게 된 사람들은 여기 머무를 필요가 없습니다. 비행기는 가망이 없으니 환불을 받는다 치고, 다음 목표는 기차역이 되겠죠. 하지만 만일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붐비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기차역으로 가 보았자 수상한 자와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아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
“자동차를 빌려야죠.” 장량이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진평은 다시 맛있는 음식 앞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건 빈틈이 너무 많은 설명인데요.” 장량은 술잔을 가볍게 흔들면서, 장식으로 걸린 잔들이 좌우로 흔들거리는 것을 무료하게 바라보았다. “날씨 때문에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습격을 계획한 사람이든 다른 누구든 이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내가 물을 말이다. 진평은 조금 입을 삐죽거렸다. “날씨가 반드시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는 법은 없어도, 비행기가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 영향이 얼마나 클지까지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지만...... 만일 아주 다급한 일정이라 꼭 가야만 한다면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할 테고요. 계획한 사람은 자동차에 탔던 그 인물이 비행기나 기차를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걸 사전에 똑똑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장량은 속으로 얼마쯤 수긍했다. 진평은 샐러드를 잔뜩 우겨넣은 입으로 불분명하게 웅얼거렸다. “어떻게 안개 속에 숨어 그렇게까지 주밀한 준비를 해냈는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화려하게 막을 내리고 무사히 물러났는지, 지금 제가 몰두하는 부분은 그런 게 아닙니다. 가장 큰 목표는 타격의 정확성과 살상력을 확보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일단 일이 터진 뒤에야 도주는 비교적 쉽지 않았겠어요? 이렇게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스리슬쩍 빠져 나가고도 남죠. 주모자는 아마 망명자 신분이거나......”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장량이 진평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어라? 진평은 여기서 질문이 들어올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민감한 부분이라 자존심이 상했나.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상대가 제 속을 드러내도 될 대목이 아니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쓸데없는 말이 많았나? 딱히 그랬던 것 같지도 않다. 진평은 어쨌거나 계속 특종거리를 찾는 기자 행세를 하기로 작정했다. “그 사람을 해치우고 싶어하니까요.”
“선입견이 반영된 판단 같은데요.” 장량의 얼굴에는 진평을 삼류 기자 취급하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봐요.” 진평은 진지하게 장량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대체 어떤 할 일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온 집안 목숨까지 다 내걸면서 남의 경호원이나 좀 죽여 화풀이하고 말겠습니까? 현장 안 가봤죠? 기사에 차마 못 쓸 것도 있다니까요!”
“호오......” 장량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현장에도 가 봤어요? 별로 본인 직업에 열심인 분 같지는 않던데.”
“당연히 갔죠. 나는 특종을 써야 하니까.” 진평도 놀리듯 답했다. 어쨌거나 장량에게 반드시 말해야 했던 정보는 전달한 셈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안 믿을 수도 없겠군요. 어디 계속 얘기해 보시죠.” 그렇게 말한 장량은 핑거 보울에 손끝을 살짝 담갔다 톡톡 털어내는 것으로 디저트 맞을 준비를 했다.
차분하고 익숙하게 수행된 사소한 동작이었으나, 진평은 약간 넋을 빼앗겼다. 유리로 된 작은 보울에는 삼분의 이쯤 물이 담겨 있었다. 띄워 놓은 장미꽃잎이 촛불 아래 부드럽게 반짝였다. 장량은 오른손 손가락 첫 마디를 물에 담갔다. 가늘고 길쭉하며 마디가 뚜렷한 손끝을 따라 물결이 요동쳤지만 보울 밖으로는 넘치지 않았다. 문득 진평은 꽃잎을 헤쳐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찰나의 몽롱함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진평은 아무 뜻 없이 촛불을 건드렸다. “관둡시다. 기억 안 나는 걸 보니 별 것 아니겠죠. 참, 방금 뭔가 더 시켰나요?”
“중국어로는 ‘여린 마음心太軟’이라고 합니다만.” 그 이름을 말하면서 장량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부 자기가 떠맡을 셈인가? 진평은 생각했다. “이거...... 그냥 먹으면 되는 거죠?” 그는 처음 보는 음식 앞에서 좀 민망해졌다.
“해 봐요.” 장량은 두 손을 깍지낀 채 팔을 테이블에 올렸다. “도와 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황급하게 거절한 진평은 나이프로 바삭한 겉껍질을 단번에 갈랐다. 안에 들었던 초콜릿이 꾸덕하게 흘러나오면서 생크림과 한데 뒤섞였다. “......”
“자.” 장량은 상대방의 접시 앞에 놓여 있던 디저트 스푼을 대신 들어 생크림과 케이크와 초콜릿을 함께 떠 주었다.
“아.” 진평은 일호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다가와서는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 먹었다. 장량은 진평의 눈에 반짝이는 웃음기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스푼을 입에 문 채 디저트를 맛보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 같더니, 그대로 꿀꺽 삼키는 바람에 스푼까지 움직여서 장량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손...... 놔도 됩니까?”
진평은 고개만 끄덕였다. 호흡이 넘치는 단내로 가득했다. 씁쓸한 다크 초콜릿과 따끈한 생크림이 달콤쌉싸름하게 한데 엉기며 부드러운 케이크와 어우러져 목구멍으로 내려간다.
“맛있어요?” 장량은 다시 팔을 세워 기대며 물었다.
“으음.” 진평은 막 스푼을 입에서 뺐다. 연애하는 맛이 딱 이렇겠구만...... 그는 그림자가 제 달아오른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조금 부끄러웠던 것이다.
방으로 돌아온 진평은 랩탑을 껴안고 침대에 누웠다.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 따위로 그럴듯한 핑계를 댔지만 실상은 머릿속으로 줄곧 주판을 굴리고 있었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장량의 말은 치워 두기로 하고, 어떤 신분의 사람이어야 이제는 잘 쓰이지도 않는 핑거 보울 따위 기물을 그렇게 휴지 쓰듯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세숫대야 취급도 하지 않고, 주춤거리며 쓸 줄 모르는 것처럼 굴지도 않고, 당연히 들고 홀짝이지도 않고.
박랑사에서 그처럼 신속하게 움직였던 것을 보면 필경 그 사람의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으리라. 지금까지 명확히 드러난 동료는 한 명이다. ㅡ장량이 미리 잡아 놓았던 트윈 룸에는 이미 들어올 수 없게 됐지만. 그러나 세심한 행동과 시선으로 장량의 도피를 도운 사람들이 더 있지 않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호텔까지 철수하는 길목마다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경제적 비즈니스 관계일까. 돌파구가 되어줄 만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아니면 장량이 맥없이 죽어 버리는 것은 바라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를 경계하는, 위기에 봉착해도 도와줄지 어떨지 모르는 위구魏咎 같은 사람들이 더 있을까?
「그 자가 돌아왔다.」 진평은 장량에 대해 말할 때면 음습하게 가라앉던 위구의 어투를 떠올렸다. 「그 편리하던 신분도, 불심검문 안 받는 특권도 없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한 번 두고 보자고.」 말은 그랬으나 결국 위구는 진평을 보냈다. 그 스스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 좀 드릴까요?” 테이블 곁에 선 장량이 말을 건넸다.
“혹시 차는 없습니까?” 진평은 랩탑을 열어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아하, 야간 전투 개시인가요?” 전기 포트 소리가 멈추더니, 머들러가 간혹 컵에 부딪는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커피 향기가 가득하게 퍼졌다.
“그래야죠.” 진평은 계속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챙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별 말씀을.” 장량의 대답도 단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평의 침대맡으로 쟁반이 하나 올라왔다. 그는 눈을 힐끗 들어 정갈한 백자 찻주전자와 찻잔 세트를 확인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시면 제가 너무 민망하잖습니까.” 진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속 자판을 두드렸다.
장량은 대답 없이 소파로 돌아가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덧 목이 탄 진평은 찻주전자를 더듬어 그대로 입을 대고 마셨다가 흠칫 놀랐다. “맹물인데요?” 그는 그제야 쟁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장량이 티백을 넣지 않았던 것이다.
“주전자 쓰는 쪽이 버릇이신가 봅니다.” 장량은 책을 든 채로 웃으며 말했다. 깍듯한 얼굴이었지만 진평은 조금 낯이 붉어졌다. “주전자를 쓸지 잔을 쓸지는 사소한 문제라지만, 그래도 신경 쓰기를 잘한 셈이군요. 어쨌거나 일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뭘 그렇게까지.” 진평은 아예 점잔빼기를 그만두고 다시 주전자에 입을 댔다. “이런 특이한 배려는 어디서 배워 오셨답니까?”
“이탈리아에서.” 장량은 가볍게 대답했다. “스위스에 있을 때는 더 우스운 일도 있었죠. 뜨거운 초콜릿을 주문했더니 초콜릿 파우더와 우유를 주더군요.”
“하하하......” 진평은 난처해 하는 그의 모양새를 상상하다 내친 김에 물었다. “어디서 지냈던 겁니까?”
“해외로 나간 지 워낙 오래됐으니까, 여기저기 안 가본 데가 없죠.” 장량은 다시금 화제를 찻상으로 돌렸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사실은 찻잎을 못 찾았습니다. 찾았으면 제대로 우려서 갖다 드렸을 텐데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진평은 어쩐지 상대방이 자신을 어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괜찮으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로부터 30분쯤 지난 뒤 그는 눈꺼풀과 싸우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베개에 기댄 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랩탑은 비스듬히 미끄러져 침대 한편으로 내려갔다.
진평 대신 랩탑을 치우고 이불을 덮어 주면서, 장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특종 같은 건 그만두지 그래요. 적도 아니고 벗도 아닌 사람은 결국 둘 다이기도 하다. 아마도 옛 시절의 누군가가 보낸 재주꾼이겠지. 여기서 뭔가 더 일을 벌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노린 것이다. 기자님은 아주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장량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의 연락을 받지 못했으니 파트너는 자체적으로 플랜 B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되건 장량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 일 없는 양 지내는 것이 전부였다.
진평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장량은 협탁에 놓여 있던 전화기를 다급하게 낚아채 무음으로 바꿨다. “위무지魏無知.” 공교롭게도 단서가 제 발로 굴러들어온 셈이었으나 장량은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진평 쪽부터 확인했다. 진평은 진동음을 듣고 팔을 조금 움찔거리는 듯하더니 소리가 금방 끊기자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약효가 떨어지려면 십여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장량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이었다. 세탁실로 간 옷에서 박랑사의 흙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두 사람의 옷이 뒤섞인 채다. 골칫거리가 생기면 저 치를 보낸 누군가가 어떻게든 무마해 줄 테지.
밤은 아직 한창이다. 이제는 다가올 좋은 날을 기다리며 베개를 높여 편안히 잠들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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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본문에 등장하는 디저트 '여린 마음'은 퐁당 오 쇼콜라의 홍콩 이름입니다. 보통 대륙에서는 퐁당 오 쇼콜라를 '용암 초콜릿熔岩巧克力'이라 부르는데 작중 장량이 굳이 홍콩 이름으로 지칭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어서겠지요.
후속편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번역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