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여기
너를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벌써 224일이 흘렀다. 스무 살이 된 해에 너를 만나고, 너와 친해지고, 네가 될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었어. 2월의 눈, 3월의 바람, 4월의 꽃, 5월의 비, 6월의 모래를 함께 겪고 이제는 헤어지게 됐구나. 처음 팀에 합류했을 때 가슴 속에 가득했던 기대, 동경, 두려움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크랭크인 날에는 폰에서 각종 뉴스가 쉼 없이 튀어나왔고 겁나서 한 번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 자신조차 내게 반문하곤 했다. “네가 뭔데 장무기를 해?” 여기서 네티즌 여러분이 내게 보낸 비평과 격려에 감사하고 싶다. 그 때 감독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해 주었다. “괜찮아, 우린 같이 성장하는 거야.” 그렇다. 태어날 때부터 슈퍼히어로인 사람은 없다. ‘때려부수고 다시 만드는’ 경험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귀중한 것이었다.
사실 어려서부터 ‘장무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 테스트를 하게 됐을 때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온 정신이 불안한 긴장 속에 빠진 채 테스트에서 대사 및 감정 처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반 세기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무협 우상은 대체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뛰어난 판본이 그렇게 많은데, 대체 어떤 모습의 장무기를 해야 할까?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밤새도록 생각했고, 사람들이 왜 장무기를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나는 어렸을 때 왜 장무기가 되고 싶어했었지? 밤이 반 넘게 지났을 때에야 나 자신을 설득할 만한 답이 생각났다.
첫 번째 테스트는 참가하는 연기자들이 처음으로 한데 모인 날이기도 했다. 나는 진작 달달 외웠던 대사를 집에 두고 매니저와 함께 북경의 유명한 모 제작진이 준비한 아파트로 갔다. 장가준 감독님을 다시 만났는데, 1년 전 《사조영웅전》 테스트 때의 세심한 지도가 생각나서 마음이 어지럽던 중에도 잠깐 친근감이 들었다. 내가 테스트 받은 대목은 영사도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조민과 마주치는 장면으로, 감정이 비교적 격정적인 부분이었다. 연기를 끝내고 나니 현장은 완전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분위기가 어색했다. 장 감독님이 물컵을 들고 몇 모금 마시더니 나를 향해 웃어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별다른 평은 없었고,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보통 테스트에서 감독님들이 불만족스러울 때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의 장 감독님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좀 실망스러우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음날 매니저가 조감독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테스트가 두 번 더 있으니 힘내라는 것이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내게는 아직 기회가 더 있었다. 그렇게 10월, 11월, 12월, 1월이 될 때까지 쭉 기다렸다. 그 동안 웨이신에서 여러 제안서가 왔지만 열어 보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전부를 걸어 보고 싶었다. 혹시 떨어지더라도 감독님이 직접 이유를 말해 주었으면 했다(나의 유치함과 고집을 용서해 주기를). 4개월 동안 총 네 번 테스트를 했다. 대사도 상대도 분장도 매번 달랐지만, 끝나고 나면 장 감독님은 언제나 침묵하거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리송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위안도 되었다.
크랭크인 전날이 돼서야 장 감독님은 매니저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소희小晞더러 하라고 하죠!”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매니저를 끌어안고 싶었고, 장 감독님이 내게 기회를 준 것에 감격했다. 나는 ‘배우 증순희’가 이제 자기의 짐을 짊어지고 다시금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더 고되고 힘든 임무의 시작일 뿐이었다. 150일의 촬영 동안 절벽을 뛰어넘고, 고비 사막을 달리고,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사막에 내리는 폭우를 바라보고, 갓 태어난 새끼양을 안아 보고, 건곤대나이를 연마하고, 광명전의 결전을 치르고, 만안사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웃으며 초원을 내달리고,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줄곧 함께였다.
224일 동안의 모든 순간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 이 길을 오는 내내 청춘에 부끄럽지 않도록, 꿈을 동력으로 삼아, 용기를 가득 품고, 검에 기대어 하늘 끝까지 걸었다. 한겨울에 비가 내리는 진흙탕에서 발버둥치기도 했다. 차가운 호수에서 벌거벗고 있었을 때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한여름의 고비 사막에서는 발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와이어에 매달려 16시간의 결전을 벌인 뒤에는 39.4도까지 열이 오른 적도 있었다. 눈을 돌리니 이제 정말 작별해야 할 시간이다. 이 날이 올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은 내가 무기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행운을 누렸다는 걸 아직도 믿기 어렵다.
촬영하는 150일 동안 고마운 분이 정말 너무 많았다. 가장 고마운 건 사랑스러운 네 명 아씨들. 무기의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근심을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가장 힘들 때 너무나 많은 힘이 되어 주신 태사부님, 의부님, 멸절사태께 감사드립니다. 6개월 간 함께 고생한 배우 여러분, 한 발씩 성장해 나가는 무기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장가준 감독님, 기아영시, 화하시청, 두연 감독님, 팽학군 감독님, 강홍민 감독님, 이국원 감독님(무술감독), 정욱 형(캐스팅 감독)께 감사드립니다. 감독팀, 제작팀, 촬영팀, 조명팀, 무술팀, 분장팀, 헤어팀, 의상팀, 미술팀, 소품팀의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여러분의 노력과 고생 덕분에 새로운 《의천도룡기》가 완성되었습니다.
무기, 너와 헤어지는 아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와의 만남, 너그럽고 두려움을 모르는 너의 성품,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너의 사람됨, 너의 뜨거운 마음에 감사해. 완벽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여한이 없어. 참, 그 날의 답은 크랭크인 전에 장 감독님이 내게 해 줬던 말이다. “슈퍼히어로도 사실은 사람이야. 평범한 사람. 온갖 풍상과 고초, 슬픔과 기쁨, 만남과 이별을 겪지. 절세의 무공은 중요하지 않아. 사랑과 관용이야말로 평범한 사람에게는 가장 어렵고 귀중한 자질이야. 너의 성실함과 선량함을 잘 지켜나가길 바란다.”
나는 장무기다
소년이 힘 없다고 무시하지 말 것*
소년이 힘 없다고 무시하지 말 것 :
『유림외사儒林外史』의 구절. 차라리 수염 흰 노인을 무시할망정, 소년이 힘 없다고 무시하지 마라. 언젠가는 용과 봉처럼 날아오를 터, 평생토록 구멍난 바지만 입고 있을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