御风少年张二狗님의 의천도룡기 2019 팬픽션입니다. 문화대혁명 AU 장무기X양소.
아래 *는 작가 원주, (괄호 안 회색 글씨)는 역주입니다.
원문 : https://alwaysxuebiwang.lofter.com/post/1cb66f1d_1c5c7903d
* 문화대혁명 배경.
* 자학적인 불순문학.
* 주제 없이 되는 대로 씀.
* 재미없지만 엄청 김. 이미 자포자기.
* ALL양소 암시 있음.
* 민민은 여자고, 무기를 좋아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 무기양소는 진심. 약간 모호하지만.
* 고증을 거쳤습니다. 참고 도서는 『사나운 동물(动物凶猛)』, 『협변구 기록(夹边沟记事)』(둘 다 문화대혁명 시기 작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회고록 약간, 순문학 약간(흉내 못 냄). 대부분의 디테일은 대충 지어낸 것.
지극히 평범한 날의 일이었다. 일반내과 주임 장무기에게 한 환자가 찾아왔다. 서른 살 전후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머리를 어깨에 닿도록 길렀고 얼굴에 별 세월의 흔적이 없었다.
“장무기.” 그는 전국에 명성이 자자한 의사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불렀다. “나 기억 안 나?” 장무기는 환자의 차트를 살펴보았다. “조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조민이야?”
“감히 나를 까먹다니!” 조민은 짐짓 화내는 시늉을 했다.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장무기는 멋쩍게 웃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래. 십 년도 넘었지?”
“십오 년 됐지.” 조민이 말했다. “1977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두 사람 다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그저 세월이 흐른 탓에 “자주 연락하자!” 하고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는 친구처럼 되어 버렸을 뿐이었다. 일단 다시 만나니 그 틈새는 저절로 메워지고 누렇게 바랬던 기억들이 소리 없이 선명한 밑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옛날의 사람들, 이야기들,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말라붙었던 과거를 머릿속 구석에서 끄집어내 햇볕을 쬐어 주는 것 같았다. 진료 시간은 한계가 있어서 퇴근 후에 다시 만나 더 이야기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일어서기 전, 조민이 갑자기 비밀스레 장무기에게 말했다.
“여름에, 북경에서 양소를 봤어.”
장무기는 문득 심장이 확 조이는 듯했다. 표정에 초조한 기색이 섞여 들었다.
조민은 웃었다. “나는 잊어버려 놓고 그 사람은 기억하네.”
그는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 장무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의사 선생님한테 주는 뇌물이야.”
장무기는 종이를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희어지도록, 손톱이 피부에 박히도록 꽉 쥐었다.
1992년 초겨울이었다.
1
1967년 초봄, 열네 살의 장무기는 감숙甘肅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중국 서북부의 성으로 반우파투쟁 시기부터 문화대혁명 기간까지 많은 ‘우파’들이 집단 농장으로 보내져 강제 노역을 했던 지방). 1966년 「5.16 통지」와 「16조」가 발표된 이래 전국 각지에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운동이 불길처럼 전개되고 있었다. 기차는 ‘4대 구습을 타파’하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든 교사와 학생들로 가득했다. 장무기는 그 속에 섞여 손발을 웅크린 채, 돼지기름으로 한 겹 덮인 것처럼 끈적이는 의자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그렇게 움츠린 자세에 익숙했다. 홍위병들처럼 의기양양 위풍당당한 흉내는 내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우파로 몰려 어느 변경 농장으로 노동 교양을 받으러 보내지고, 남편이 길거리로 끌려 나가 비투를 당하면서(비판 투쟁의 줄임말. 문혁 시기 ‘우파’로 분류 당한 사람들을 대중 앞에 끌고 나와 공개 비난하던 것), 그 옛날 기세 좋던 부르주아 아가씨는 숨죽여 살아남는 법을 홀로 깨우쳤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혼란하던 그 시대에 그의 구차함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의 남편, 그, 둘의 외동아들 장무기에게마저 그랬다. 그저 화를 참고 삼키며 물러났다는 이유로 그들은 짓밟히고 유린당하고 모욕당했다.
1967년 초봄, 장무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목숨을 끊었다. 들보에 조잡하게 매달린 채 바람에 말라 가는 생선 같은 두 구의 시체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원래 66년 말에 떠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계획은 잠시 보류되었다. 초봄이 되면 얼음도 녹아 땅이 풀릴 테니 장무기처럼 마르고 약한 아이라도 쉽게 매장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그들은 손에 손을 잡은 채 안심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잠깐의 고통으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해탈이었다. 장무기는 슬프지 않았다. 심지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는 새 오리털 이불로 부모의 시신을 싼 뒤, 그가 방금 파낸, 아직도 젖어 있는 구덩이로 정중하게 모셔 드렸다.
1967년 초봄, 장무기는 부모와 작별했다. 그에게는 찾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길거리 한복판의 뜨거운 물결에 치이고 밀려가며, 그는 감숙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사람으로 꽉꽉 메워진 기차는 빠르게 달려 고개를 넘고 산맥을 지났다. 그에게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뒤로 물러나며 무너지고 사라져 갔다.
기차의 종점은 란주역이었다. 장무기는 또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탄 끝에 드디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현에 도착했다. 구석진 시골 현이었지만 노동개조국 책임자는 인원 모집의 기준을 엄격히 지키려 했다. 장무기는 나이도 어렸고 출신성분도 좋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일자리도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우파 자녀를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책임자는 장무기가 농장에 남아 무급으로 일을 돕는다면 노동개조대에서 간단한 숙식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장무기는 그대로 농장에 남아 목축대의 의무방목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장무기는 양 떼를 데리고 사방을 쏘다니며 한가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는 조용하고 온순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아무 목적도 없이 걷다 서다 하며 그의 영토―엉망진창인 농장―를 구석구석 빠뜨리지 않고 순시했다. 그러나 농장 근처에는 볼만한 것이 정말 전혀 없었다. 우파들이 제 손으로 판 동굴집만 사방에 널려 있었다. 제각각 크기가 다른 동굴들은 피부에 솟아오른 악성 종양 같았다. 장무기 자신도 그 종양 속에서 살았다. 삶은 끈적한 고름처럼 흐리멍덩하게 사방으로 흐르고, 누렇게 구불거리며 보기 싫은 흔적을 남겼다.
여름이 되기 전 장무기는 농장의 끔찍한 생활 환경에 적응했고, 업무 외 여가 활동을 찾아냄으로써 고생 속의 낙도 생겼다. 멍하니 한 집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 집은 평범하고 볼품없는 단층집이었다. 장무기에게 익숙한 빨간 벽돌도 푸른 기와도 없었다. 농장 가장자리에 짐승의 이처럼 들쭉날쭉 깔린 이 집들은 출신과 사상이 올바른 중하층 농민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집주인들이 앞뒤로 돈 될 만한 혹은 쓸 만한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은 탓에, 대부분의 집은 쓰레기 더미 속에 기우뚱하니 기운 없이 선 것처럼 보였다. 장무기가 마음을 준 그 집만은 똑같이 납작하니 낡았어도 홀로 깔끔하고 깨끗했다. 시커멓고 황폐한 건물들 사이에서 유독 여유롭고 즐거워 보였다. 양 떼가 풀을 찾으러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면 장무기는 그 집 문가의 헐벗은 나무 아래 서서, 닫힌 창문 너머의 잔꽃무늬 커튼과 햇빛 아래 윤나는 자물쇠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자기 자신이 거의 잃어버리고 만 것들을 기억 속에서 찾아내려는 듯이.
한여름이 되었을 때도 질리지 않았다. 그는 이 집이 아주 좋았다. 아주 조금밖에 없는 부모님과 옛 기억의 잔해가 남김없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그 집이 튼튼한 테이프처럼 그와 그의 과거를 한데 이어 붙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벽에 달라붙어 그 집을 응시하며 집주인이 어떤 사람일지 혼자 상상해 보았다. 감숙의 태양은 지독히도 밝아서 머리가 아찔하게 울렸다.
“어이, 형씨.” 바퀴가 지면과 마찰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누군가 친절하게 말했다. “그만 봐. 양소는 집에 없어.”
장무기는 몸을 돌렸다. 자전거에 탄 남자아이가 발로 땅을 짚으며 브레이크를 잡고 그의 뒤에 멈춰 섰다. 남자아이의 짧은 머리칼은 바람에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땀방울이 머리칼 속에서 반짝이며 굴러 나와 턱을 타고 한 방울씩 떨어졌다.
“양소?” 장무기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양소가 누구야?”
“양소도 몰라?” 남자아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너 새로 왔어?”
장무기는 성실하게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
남자아이는 웃었다. “난 조민이라고 해.” 그는 자기소개에 익숙했다. “너는?”
“장무기.” 장무기는 사실대로 답했다. 그는 문득 조민의 자전거를 살폈다. 모든 부속이 반짝거리도록 닦여 있는 최신 봉황표였다. 진흙과 먼지로 덮여야 했을 바큇살마저 하얗게 빛났다. 장무기는 자전거 가격은 몰랐지만, ‘도는 것이 셋, 우는 것 하나’(자전거, 재봉틀, 손목시계 / 라디오. 이 시기 ‘있는 집’의 상징)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조심해야 했다.
“엄청 좋은 이름이네.” 조민은 말했다. “좋아. 장무기, 이제 우린 친구야.”
조민은 장무기에 비해 훨씬 이 농장을 잘 알았다. 그는 모든 무산계급 대중과 우파 지식분자의 이름을 댈 수 있었고, 우파 분자들의 본래 신분과 우파가 된 연유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조민에게서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조민에 의하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우파로 분류된 것은 그들의 이전 상사였던 성당위원회 서기 양정천 때문이라고 했다. 양정천이 우파로 몰리면서 그의 수하들은 전부 연루되었다. 양소 역시 그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되지만 양소는 알아둬야지.” 조민은 말했다. “헤프기로 유명하거든.”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그렇게 말하고는 짐짓 웃었다.
“여자야?” 장무기는 물었다.
“남자.” 조민이 답했다. “남자가 농장 안팎 인간들이랑 죄다 자고 다녔다니 대단하지 않아?”
장무기는 그 집 때문에 생전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호감이 생긴 뒤였으므로 조민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호감 때문에 조민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조민의 집안 배경을 어렴풋이 눈치챘으므로 더욱 그랬다. 그는 여전히 그 집 앞에 충실한 개처럼 선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조민이 말한 헤픈 사람을 한 번 보고 싶다는 기대를 품고서. 그 기묘한 감정을 장무기 자신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무기의 사유에 뿌리를 박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점 자라났다.
2
농장에 온 지 81일째 되던 날, 장무기는 낯선 친척들을 보았다. 그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었다. 동시에 양소도 보았다.
햇빛이 눈부신 오후였다. 장무기는 구매과에 물품 구매 계획서를 내려던 참이었다. ―조민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장무기는 농장 위생소의 정식 의무원으로 편제될 수 있었다. 매달 20원의 월급이 들어왔다― 구매과 사무실의 동지들은 별 의미 없는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얼굴에 은밀한, 입에 담을 수 없는 종류의 흥분이 보였다.
“가자.” 조민이 말했다. “비투대회 할 때가 됐어. 늦게 가면 좋은 자리가 없단 말이야.”
“나 계획표 내야 하는데….”
“그깟 게 뭐가 중요해.” 조민은 난폭하게 그의 말을 끊고는, 장무기의 팔을 잡아끌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무 때나 내도 되는 거잖아. 비투대회는 놓치면 그걸로 땡이라고.”
비투대회는 농장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강당은 농장의 건물 중 최고급이었다. 도자기 벽돌이 군데군데 박힌 외벽은 두꺼운 황갈색으로 덮여 간신히 밑색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문 양쪽의 벽에는 거칠고 눈에 확 띄는 글씨가 쓰인 종이가 두 장 붙어 있었다. ‘우귀사신(본래 잡귀를 가리키던 말이나 문혁 시기에는 봉건적 폐습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임) 일절 타도’와 ‘무산계급 혁명 만세’가 삼엄한 문지기처럼 장무기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장무기는 다시 올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얼른 고개를 숙이고 조민을 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섰다.
둘의 자리는 아주 좋았다. 새빨간 카펫이 깔린 무대 바로 앞이었다. 무대 위에 사람들이 두 줄로 서 있었다. ―장무기는 두 번을 세 보았다. 총 24명이었다― 앞줄의 8명이 오늘 비투대회의 주인공이었다. 분위기를 돋우려는 것처럼 강당 지붕의 조명이 곧장 그들의 몸 위로 떨어지고 있어서 다들 낯빛이 병적으로 창백해 보였다.
뒷줄의 16명 중 하나가 주머니에서 몇 번이나 접힌 종이를 꺼내더니, 마이크를 쥐고 앞줄로 나서서 무대 위아래를 향해 당의 지시 문건을 읽기 시작했다. 간사처럼 보이는 젊은 사회자는 우파 분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개한 뒤 격앙되고 강개한 어조로 그들의 죄상을 늘어놓았다. 그들을 신중국의 찌꺼기, 사회주의 사회의 종양, 무산계급 문화혁명의 말종으로 만들고 나서 오만하게 내려다보듯 물었다. “죄를 인정하고 법대로 따를 텐가?”
우파 분자들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조용히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본 사회자는 더욱 성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의미한 배수구를 치지 마라! 너희의 그런 태도는 너희 자신을 국가와, 당과, 인민과 영영 단절시킬 뿐이야!”
제일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앞으로 반 발짝 걸어 나와 정중하게 말했다. “배수진.”
사회자는 잠시 굳었다가 되물었다. “뭔 수진?”
남자는 말했다. “배수진을 치다.”
무대 위 우파 분자들은 눈을 들어 조명을 올려다보며 죽을힘을 다해 입을 꽉 다물었다. 다들 웃음을 참느라 입매가 떨리고 있었다. 무대 아래의 군중은 야박하게도 가차 없는 폭소를 터뜨렸다.
사회자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부끄러워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남자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양소, 네놈…!” 알맞은 형용사를 찾지 못했는지 그의 말은 거기서 뚝 끊기고 말았다.
양소는 이런 앞뒤 없는 비난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러나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저 손을 늘어뜨리고 조용히, 누가 봐도 가짜인 게 뻔한 아주 유순한 표정을 지은 채로 서 있었다. 대회가 허둥지둥 끝나고 모두 해산할 때까지 그렇게 그대로였다. 그는 반성하는 기미도 없었고 회한이랄 것도 없어 보였다. 명멸하는 빛과 그림자 아래 아무 동요도 없이 오래도록 서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그저 담담하게 방관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농장에서는 어수선한 비투대회가 몇 번 더 열렸다. 장무기는 조민이 재촉할 것도 없이 언제나 대회를 보러 달려갔고 잘 보이는 자리를 열심히 차지했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한 무리 또 한 무리씩 바뀌었다. 대부분은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양소와는 달랐다. 그들의 표정은 체념과 마비에 가까웠다. 그러나 장무기의 간절한 마음이야 어쨌건, 그는 무대 위에서 다시는 양소를 보지 못했다. 장무기는 우울해졌다. 아무 쓸데도 없는 비투대회에 온 여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흐릿한 안개 속에 꼭꼭 숨은 다른 무언가 때문이기도 했다.
여름은 이내 지나갔다.
3
양소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가을 무렵이었다.
그날 밤 장무기는 위생소 당직을 서면서 『계통 해부학』과 『국부 해부학』을 힘겹게 독학하고 있었다. 책은 위생소 책임자 호청우가 억지로 떠안기고 간 것들이었다. ‘자산계급의 반동적 학술 권위’를 가졌다고 분류 당한 이 우파 분자는 장무기를 제자로 삼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의학 교재들을 잔뜩 갖고 있었고, 가짜 과학으로 규정된 그 책들을 장무기에게 달달 읽고 외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이론적 기초가 없는 장무기는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훑으면서 그 글자들이 뇌에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양소가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는 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장무기가 아예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잠시 실례.” 양소는 영수증을 내밀며 말했다. “약을 받으러 왔는데.”
장무기는 의학 용어로 가득한 책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먼저 하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손에서 팔을 따라 조금씩 위를 향했다. 양소가 바로 앞에 서서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가 바닥과 부딪치며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장무기는 황급히 일어섰다. 오래도록 상상 속에만 있던 사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받은 충격과 울림을 정확하게 묘사해 낼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호청우가 당부하고 간 진료 절차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장무기는 양소에게 사열 받는 새내기 병사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양소는 다시금 영수증을 내밀었다. 말소리에 비음이 심하게 섞여 있었다. “여기 목록에 적힌 약.”
장무기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종이에 코를 박은 채 약품 이름을 몇 번씩 반복해서 입속으로 읽어 보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거, 링거예요.” 장무기는 수액 두 개의 이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거랑 이거, 둘 다 링거예요.”
양소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종이를 돌려받아 자세히 확인한 뒤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두 병 맞으려면 얼마나 걸리지?”
장무기는 수액의 용량을 가늠해 보고는 신중하게 답했다. “최소 두 시간 정도.”
양소는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장무기를 위아래로 훑어 보고는 몇 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자못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퇴근이 언제야?”
장무기는 의약품 상자를 들고 걷다 뛰다 하면서 양소의 뒤를 따라갔다. 착실하게 위생소 야간 당직을 서고 있어야 할 그가 왜 대담하게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양소를 따라 나온 것인지 그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양소가 가짜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 자신의 과감함도 가짜 같았고 발 아래 길도 가짜 같았다. 잠겨 있던 자물쇠가 풀리며 가벼운 소리가 났을 때야 비로소 현실 같지 않은 현실감이 한 가닥 생겨났다.
자그마한 집은 방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양소는 그중 하나로 장무기를 데리고 들어갔다. 넓다고는 할 수 없는 방이었다. 침대와 옷장, 책상과 의자 따위 가구들이 정연하게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장무기는 방 안의 살림을 둘러보며 수액 병을 어디에다 두면 좋을지 생각했다.
양소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새하얀 팔을 드러내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
호청우의 감독 없이 단독으로 수액 주사를 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장무기는 함부로 바늘을 꽂아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지혈대를 묶은 후 양소의 팔을 쥐고 고개를 숙인 채 이리저리 혈관을 관찰했다.
양소는 장무기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혈관이 잘 안 보여?”
장무기는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호 선생님한테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혹시 잘못 찌를까봐요.”
양소는 그 말을 듣더니 무슨 소리냐는 듯이 웃었다. “잘못 찌르면 다시 하면 되지.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혈관 찾고 있는 걸 알았으니 망정이지, 몰랐으면 손금 보고 있나 했겠다.”
장무기도 웃고 싶었으나 그보다 앞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양소가 농담을 한 덕에 적지 않게 긴장이 풀려서, 바늘은 순조롭게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링거대를 대신할 만한 물건을 찾지 못한 장무기는 수액 병을 든 채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나무처럼 서 있었다.
“딸아이 방에 스탠드 옷걸이가 있는데, 그걸 가져다 걸어 두면 될 것 같구나.” 양소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동존서처럼 굴지 말고.”(국공내전에서 19세에 전사한 홍군 병사. 작전 과정에서 아군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영웅시되던 인물)
“딸이라고요?” 장무기는 경악해서 물었다.
“응.” 양소는 담백하게 답했다. “딸이 있는 게 이상해?”
장무기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호한 관념 속에서, 부모란 아무런 개성 없이 그저 묵묵하게 헌신하는 생물이었다. 개별 개체였을 때에는 그들도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되면 책임감과 걱정으로 베이고 다듬어져 모두 똑같은 목재가 되었고, 굳게 땅에 박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울타리로 변했다. 양소는 달랐다. 양소는 맑은 바람이었고, 밝은 달이었고, 창 밖에서 흘러들어와 사람을 이유 없이 울게 만드는 ‘자작나무 숲’ 노래 같았다.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을 것 같았고 무엇으로도 붙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양소에게는 정말로 딸이 있었다. 여자아이는 엷은 땀이 배어 발갛게 윤이 나는 얼굴만 내놓은 채 이불 속에서 얌전히 자고 있었다. 옷걸이는 침대 곁에 세워져 있었다. 장무기는 옷걸이에서 자라난 조그만 치마들을 살금살금 걷어낸 뒤 양소의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는 의약품 상자에서 도구를 찾아 수액 병을 옷걸이에 걸고, 양소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수시로 수액이 들어가는 속도와 병에 남은 양을 확인했다. 사실 그렇게 자주 고개를 들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저 뭔가 할 일이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손발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양소는 장무기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는 다정한 어른처럼 자연스레 신변잡기로 화제를 돌렸고, 장무기는 하나하나 대답했다. 옆방에서 깊게 잠든 아이가 깰까 걱정되어, 두 사람 다 상대방이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둘만의 비밀을 나누는 것 같았다.
“말씨를 들으니 여기 사람은 아닌데.” 양소가 물었다. “어쩌다 이런 몹쓸 곳까지 왔어?”
장무기는 잠시 망설이다 사실대로 대답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요. 갈 곳도 없고, 여기 오는 기차는 표도 돈도 안 받는다길래, 그냥 왔어요.”
양소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바늘이 꽂혀 있지 않은 손으로 장무기의 손등을 위로하듯 토닥였다. “삶인들 무엇이 즐겁고 죽음인들 무엇이 괴로울까. 너무 슬퍼 말고 마음을 잘 추스르렴.”
“슬프지 않아요.” 장무기는 모호하면서도 침착하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슬프지 않아요. 진짜로요.”
양소는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내리깐 눈은 연약하고도 무구해 보였다. 흑백이 또렷한 눈이 보내오는 시선은 곧았고 그 안에 다정과 관심이 가득히 흐르고 있었다.
장무기는 제 마음을 다 털어놓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을 정리해 가며 띄엄띄엄 말을 이어 나갔다. “부모님에게는 그분들의 원칙이, 존엄 같은 것들이, 자식인 저보다 중요했던 거겠죠. 그것들을 선택했고 선택한 대로 하신 거죠. 그 선택이 옳은 건지 틀린 건지 저는 모르겠어요.” 그는 막막한 얼굴로 양소를 마주 보았다. “아버지로서, 원칙과 존엄 혹은 딸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양소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저 약 거의 다 들어간 것 같은데.” 그는 고개를 들어 수액 병을 쳐다보았다. “다른 병으로 바꿔야겠구나.”
4
양소는 나흘 동안 링거를 맞은 뒤로 위생소에 오지 않았다. 장무기는 매일 같이 기다리다 매일 같이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끈적이는 우울에 푹 빠진 것 같았다. 조민이 위생소에서 온종일 우스운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흥미가 가지 않아서 가끔 억지로 웃어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어, 웬 꼬마 아가씨지.” 조민이 팔로 장무기를 툭툭 쳤다. “네 동생이야?”
정말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위생소 문을 잡고서 고개를 내밀어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장무기 오빠 여기 있어요?” 아이는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장무기는 일어서서 나갔다. 여자아이가 입고 있는 분홍색 치마는 잘 마감된 아랫단에 꼭 맞는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수도 많지 않은 농장 여자들은 천편일률로 거친 옷감의 푸른색 치마를 입고 다녔다. 이렇게 하늘거리고 귀여운 치마를 입을 사람은 양소의 딸밖에 없다고 장무기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장무기야.” 그는 쭈그리고 앉아 여자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무슨 일로 왔니?”
“나는 양불회인데, 양소의 딸이야.” 여자아이는 아버지의 당부를 기억해 내기 위해 눈썹을 열심히 찡그렸다. “양소라고 하면 알 거라고 아빠가 그랬어. 아빠는 무슨 일이 있으니까 날 좀 돌봐 달래.”
“양소가 딸이 있었어?” 조민이 다가오더니 여자아이의 얼굴을 한참 훑어보았다. “어라, 진짜 닮았네.”
“몰랐어?” 장무기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양소랑 만나본 적도 없는걸. 양소 이야기는 다 우리 형한테 들은 거야.” 조민이 말했다. “넌 별로 안 놀란 눈치네. 알고 있었어?”
“아니.”
장무기는 어째서인지 조민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아서 엉겁결에 부인해 놓고는 우물우물 둘러댔다. “너는 아는 게 많잖아. 난 네가 뭐든지 아는 줄 알았지.”
조민은 알겠다는 것처럼 괴이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라고 늘 아무 생각도 없이 발랄한 것은 아니었다. “하긴 내가 양소여도 딸이 있으면 집 안에 숨겨 놓겠다.” 그는 양불회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웃었다. “양소는 워낙……”
“불회야, 사탕 먹을래?” 장무기는 조민의 말을 끊으며 상냥하게 물었다. “삼색 사탕 줄 테니까 이리 들어와서 먹자. 괜찮지?”
그는 양불회를 위생소로 데리고 들어가, 서랍 안에서 빨강 초록 노랑 과일맛 사탕들을 꺼내 주었다. 양불회는 이런 싸구려 사탕을 먹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투명한 포장을 벗기고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사탕을 쳐다보았다.
혼자 위생소 문 밖에 남겨진 조민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표정이 약간 굳은 채 느닷없이 장무기를 향해 물었다. “넌 내가 그렇게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사람으로 보여?”
장무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조민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조민이 양불회 앞에서 양소에 관한 유언비어를 입에 담을까봐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조민이 그렇게 정도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조민의 말을 끊었다. 모든 불확실성을 단번에 없애고 싶었다. 그의 신뢰가 일종의 전쟁 목표인 셈 친다면, 몇 번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양소가 거의 매일 함께 어울려 노는 조민을 총칼도 쓰지 않고 이겨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무엇이 이상한지 눈치채지 못했다.
조민은 침묵하는 장무기를 바라보다가 화를 내는 대신 웃었다. “그래.” 그는 말했다. “그럼 더 거치적거리지 않게 난 간다.”
낮은 순식간에 저물었다. 양소는 밤의 장막이 내리덮이고 양불회가 병상에서 깊은 잠에 빠진 뒤에야 나타났다. 그는 ‘상해上海’라고 인쇄된 검은색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가방은 무엇이 들었는지 여기저기 온통 낭종처럼 울퉁불퉁 튀어나온 모양새였다.
“웬 짐을 이렇게 들고 오셨어요.” 장무기는 얼른 여행 가방을 받아 들었다. 부피는 어마어마하게 컸지만 들어 보니 의외로 가벼웠다. 장무기는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 소독용 알코올 있어?” 양소는 장무기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곧장 물었다.
“네.” 양소의 태도는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으나, 장무기는 어째서인지 양소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다치셨어요?”
“비슷해.” 양소가 답했다. 그는 병상 가장자리에 앉아 겉옷을 벗고는 셔츠를 반쯤 내렸다. 오래도록 볕을 쬐지 못해 옥처럼 흰 피부가 셔츠 아래 드러났다.
장무기는 진지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양소는 피부가 희어서 어떤 흔적이든 감춰지지 않았다. 장무기는 거의 한눈에 양소의 목덜미에 남은 잇자국을 알아볼 수 있었다.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원이었다.
“이, 이거….”
그는 조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조민 앞에서 양소를 두둔했던 것을 떠올렸다. 창가의 잔꽃무늬 커튼과 윤나던 자물쇠를 떠올렸다. 너무 많은 것들이 그를 두드렸다. 오장육부가 한데 뭉치고 엉켜 그대로 토할 것 같았다.
양소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맞아.” 양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소독 좀 해 줄래?”
장무기는 거의 알코올 병의 뚜껑을 열지 못할 정도였다. 면봉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뭔가 말 못 할 일이 있으셨어요?”
“아니.” 양소는 단호하게 답했다. “내가 선택한 거야.” 그것은 장무기에게 답하는 말 같기도 했고, 그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장무기의 머릿속에는 ‘윤락’ ‘더러운’ 따위의 글자들이 무수히 떠다녔다. 그는 양소를 이렇게 악의적으로 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번째 단어가 떠오르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단어들이 벌떼처럼 솟아올라 그의 사고를 꽉 채우고 단단히 둘러쌌다. 장무기는 독을 품은 것처럼 부정적인 단어들에 목구멍이 콱 막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양소의 상처를 소독했다. 알코올에 푹 젖은 상처가 투명한 액체 아래서 그를 조소하는 것처럼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양소는 셔츠를 다시 올렸다. 알코올이 옷감에 묻어나며 투명한 얼룩을 남겼다. 그는 셔츠 단추를 잠그면서 고개 숙인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날 욕하고 있구나.” 그는 침착한 투로 말했다.
“아니에요.” 장무기의 대답은 어색했다.
양소는 웃었다. 무해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 그는 말했다. “상스럽다든가, 더럽다든가, 정말로 안 했어?”
장무기는 고개를 숙인 채 단추를 만지작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인이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무슨 일이 생기든 다 내가 감당할 몫이야.” 양소는 말했다. “후회는 없어.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아.”
그날 장무기는 거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비몽사몽간에 그는 동굴 밖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낮게 가라앉은 그 목소리는 양소의 것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양소가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위로 달빛이 흘러 투명하도록 희게 빛났다.
장무기는 입과 혀가 바싹 말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억지로 정신을 추스르며 탐색하듯 말을 꺼냈다. “양소 아저씨?”
양소는 온화하게 미소짓더니 봄바람처럼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바싹 몸을 붙였다. 매끄럽고 보드랍고 나른한 흰 뱀 같았다.
장무기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양소를 마주 끌어안았다. 두 손이 양소의 등이 그리는 곡선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장무기의 손이 제게 속한 영토를 측량하는 것처럼 피부의 모든 곳을 구석구석 훑는 동안 양소는 온순하게 그의 품 안에 엎드려 있었다.
장무기는 자신이 발기했다는 것을 똑똑하게 느꼈다. 온 몸뚱이의 혈액이 일순간에 성기로 몰려들면서 부풀어 오르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황당하고 부끄러워서 빨개진 얼굴로 다급하게 양소를 밀어냈다.
양소는 장무기의 이상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런 경계심도 없는 무구한 낯으로 장무기의 달아오른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악한 바지 위로 그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장무기는 번쩍 눈을 떴다.
성욕이 사라지지 않아서 성기는 아직도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는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기계적으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그는 해부학 교과서에서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 구조도를 봤을 뿐이라, 온도를 가진 완전한 나체를 상상해 낼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새하얀 등이었다. 어깨 부근에 얕은 잇자국이 있었다.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 맞물리지 않는 원 모양의.
장무기는 거친 숨을 내쉬며 절망적으로 사정했다.
겨울 내내 그는 한 번도 양소를 보지 못했다. 무슨 낯으로 양소를 대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의학 교재에는 평소의 바람이 몽정의 내용에 투영된다고 쓰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진짜로 양소를 더럽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켕겼다. 자괴감과 우울 속에서 1968년이 되었다.
5
1968년 2월, 당 중앙은 「진일보한 절약 혁명을 일으켜 지출 절약을 결연히 실행하는 문제에 관한 긴급 통지」를 발표했다. 장무기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정치가 자신과 관련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관련이 많았다. 그의 월급은 매월 15원으로 조정되었고, 배급되는 식량도 매월 18근(9kg)으로 줄었다. 장무기는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재무과에서 돌아오니 호청우가 위생소에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다들 난리가 났는데, 아직 못 들은 거냐?” 호청우는 또 한숨을 쉬었다. “식량이 깎였잖아. 성인 기준 1개월 24근이었는데 이제 18근이야.”
“협동조합에서 식권을 사면 되잖아요.” 장무기는 말했다.
“너는 진짜 뭘 모르는 거야, 아니면 머리가 나쁜 거야?” 호청우는 ‘밥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잖아요.’ 하는 멍청이를 보는 얼굴이 되었다. “우파 노동 개조에 월급이 어디 있어. 은행 자산도 다 동결 당한 판에 무슨 돈이 있냐고.”
“예?” 양불회의 화려한 치마를 떠올린 장무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월급이 없을 수가 있어요?”
호청우는 손을 내저으며 냉소했다. “누가 아니래. 나야말로 그게 궁금하다.”
장무기는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아서 조민에게 확인해 보았다. ―두 사람이 껄끄럽게 헤어지고 사흘째 되던 날 조민은 다시 장무기 앞에 나타났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자약했다― “노동 개조라는 건 원래 강제노동이잖아. 우파 분자들에게 무산계급 노동자와 농민의 고생을 체험시켜서 낙후되고 부패한 사상을 개조하자는 거지.” 조민이 말했다. “월급을 줬다간 자산계급 버릇을 더 조장하는 셈이 되게?”
“그럼 우파 분자는 전부 다 월급이 없어?” 장무기는 다시 물었다.
“뭐가 궁금한 건지 알겠다.” 조민은 악의 없이 웃었다. “어쨌거나 양소는 월급이 없어. 그리고 그 딸은 농장 호적에 등록도 안 된 처지라 배급받을 식량도 없어. 그 아이는 지금까지 굶어 죽지 않은 것만도 운이 좋은 거야.”
장무기는 목구멍이 뭔가로 꽉 틀어 막힌 것 같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울대가 살갗 아래서 불안하게 울렁거렸다.
몇 달이 지난 후 장무기는 드디어 식당에서 양소를 만났다. 양소는 혼자 창가 자리에 앉아, 식당의 형편없는 밥이 산해진미라도 되는 것처럼 품위 있고 고상한 태도로 먹고 있었다.
장무기는 식판을 들고 창가로 곧장 다가가서 양소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람 있냐고 물어보지도 않는구나.” 양소는 젓가락을 놓고 느긋하게 말했다.
“사람 있어요?” 장무기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아 버렸나 싶었다.
“이제 있지.” 양소는 진지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별것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장무기는 얼굴을 붉힌 채 더듬거렸다. “아저씨는 정말 군자란 생각이 들어서요.”
“웬 아첨이야.” 양소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난 군자는커녕 군자란君子蘭도 못 되는 사람인데.”
“이제야 알았어요.” 장무기는 말했다. “원칙이며 존엄 같은 것들과 자식 사이에서 딸을 선택하셨던 거죠.”
양소는 이런 직설적 해석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웃음기를 거뒀다. “평범한 부모라면 다 그렇게 해. 별 대단한 일도 아니야.”
“제가 멋대로 오해했는데 해명도 하지 않으셨죠.” 장무기는 못 들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마음을 다해 성의껏 사과했다. 저번의 실례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만 알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사과까지 하지 않아도 돼.” 양소는 웃었다. “다 맞는 말이니까. 어차피 나는 안 듣지만.”
장무기는 양소를 응시했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장무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분노하지도 않았고, 원한을 품지도 않았으며, 방관자처럼 냉정했다.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장무기에게는 그들 사이의 거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장무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리한 칼날로 벤 듯한 기분이었다. 피가 채 배어 나오기도 전에 가슴 속 열이 조금씩 조금씩 식어 내렸다.
6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위기 앞에서도 투쟁을 향한 군중의 열정은 여전히 드높아서, 7월의 불타는 햇살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내과학』에 고개를 처박고 골치를 썩이던 장무기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그러나 부채를 부치며 장무기의 숙제를 검사하던 호청우는 소음을 참지 못하고 볼펜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저놈들은 또 뭘 하는 거야?”
“오늘 조리돌림을 하잖아요.” 조민은 우유 빙과를 장무기와 호청우에게 하나씩 주었다. 장무기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빙과 포장지를 벗겼다. 하얀 냉기가 눈앞에 피어올랐다.
“이 날씨에 조리돌림을 해?” 호청우는 놀랐다. “얼마나 대단한 잘못을 했길래?”
“형 말로는 계간을 했대요.” 조민이 궁금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근데 계간이 뭐지?”
장무기도 몰랐다. ‘간’이라는 글자가 뭔가 모욕적인 뜻이리라는 짐작만 어렴풋이 들었다. 그와 조민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호청우에게 쏟아졌다.
왕년의 위엄 있는 교수님 모습을 조금 되찾은 호청우는 득의양양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계간이라는 건, 그러니까, 남자가, 남자랑, 성교를 했다는 뜻이지.”
장무기는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왔다. 순식간에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들어 피부에 질척하게 들러붙었으나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소음의 한가운데를 향해, 고함이 끓어오르는 곳을 향해 달렸다. 가슴에 공기가 가득 들어차서 한껏 당겨진 대장간의 풀무 같았다. 거칠게 내쉬는 숨마다 피거품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는 대야를 두드려 대는 소리를 따라 금세 조리돌림 행렬을 찾아냈다. 즐거움에 날뛰는 사람들의 벽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온 힘을 쥐어짰고, 등 뒤에서 들리는 욕설은 전부 못 들은 척 넘겼다. 다양한 나이의 ‘우귀사신’들이 인파 한중간에서 양 떼처럼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것이 보였다. 가슴팍에는 하나같이 죄명과 이름이 적힌 흰 팻말을 걸었고, 이름 위에 붉은 붓으로 커다란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구경꾼들은 희희낙락 친구들을 불러오고 흥분에 들떠 손가락질을 해댔다. 끌려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흐릿하고 눈빛도 흐리멍덩해서 영혼 없이 걷는 시체들 같았다. 장무기가 막 도착했을 때는 ‘계간범’이라는 팻말을 건 어린 소년이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문혁 소조들에게 사납게 걷어차여 진흙과 먼지투성이로 쓰러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땅에서 진흙을 움켜 소년의 얼굴과 몸에 집어 던졌다. 어른들은 왁자하게 웃었다. 소년은 홍위병의 춤추는 채찍 아래 손으로 음부만 간신히 가린 채 한껏 웅크렸다. 소리 없는 울음으로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알에서 갓 깨어난 애벌레처럼 무력한 모습이었다. 장무기는 끔찍해서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참으며 사람들을 하나씩 살폈다. 다 비슷비슷한, 한 점의 생기도 없는 얼굴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양소를 찾아내려 했다.
“저기 네 애인이라도 있어?” 양소가 물었다.
장무기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돌아보았다. 양소가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뇨, 아니에요.” 장무기는 부인했다. “아저씨가 조금, 걱정돼서요. 조금.”
양소의 입가에서 억눌려 있던 웃음기가 새어 나왔다. “나를 왜? 나도 조리돌림당할까봐?”
장무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아저씨가….” 그는 간신히 일어나려다 또 발로 차여 쓰러진 소년을 곁눈질로 보고는, 남은 말은 고스란히 뱃속으로 삼켰다.
“그럴 일은 없어.” 양소는 말했다. “미끼를 물기는 해도 바늘에 걸리지는 않아.” 눈썹 가에 능구렁이 같은 득의양양함이 아주 짧은 찰나 스쳐 갔다. “불회는 아직 한참 어린데, 별것 아닌 콩고물 좀 얻으려다 아버지를 잃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농장 사람들 말로는….”
“집단 속에 쌓이는 건 지성이 아니라 우둔함이지.” 양소는 조리돌림으로 신이 나서 웃어대며 손뼉 치는 군중들을 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러니 저들이 무슨 말을 하건 나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그들은 행렬이 시끌벅적하게 멀어져 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아직 흥이 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붉은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쳐대며 대오의 뒤를 따라갔다. 1968년 여름이었다. 불길 같은 햇살 아래서 장무기는 이유 모를 한기를 느꼈다.
“감기에 걸렸나 보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그 감기는 가을이 되도록 낫지 않았다.
1968년 가을, 양불회는 면역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독감에 걸렸다. 어린 아가씨는 고열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호흡이 뜨거워졌다. 양소는 딸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이 퉁퉁 부어 있었다.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장무기는 양불회의 팔에 해열제 주사를 놓으며 서툴게 양소를 위로했다. 해열제는 위생소 의무요원의 직책을 이용해 슬쩍 훔쳐 온 것이었지만 그것이 절도 행위라는 죄책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제가 아저씨 진단서를 써 드릴게요. 그걸로 병가 내시고 집에서 불회를 돌보시면 될 거예요.”
장무기의 눈에 양소가 그렇게 약해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고맙구나.” 그는 피로하게 말했다. 그 감사 한 마디에 가진 힘을 반 넘게 써 버린 듯했다.
“별일도 아닌걸요.” 장무기는 주사 도구를 챙겨 의약품 상자에 넣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잘 쉬세요.”
양소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 속에 어둑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돌았다.
“배웅은 못 하겠네.”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조심해서 들어가.”
장무기에게는 조민 말고도 상우춘이라는 친구가 하나 더 있었다. 상우춘은 구매과 소속으로, 직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차를 몰고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구매하고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받아 올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 장무기는 원래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을 싫어했다. 그러나 양불회의 퉁퉁 부은 팔다리를 생각하니 염치 불고하고 상우춘을 찾아가서 식재료를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는 거야 어렵지 않지.” 상우춘은 호쾌하게 승낙했다. “그런데 식권으로 뭘 사 봐야 소용이 없잖아. 부뚜막이 있는 집도 없고, 식당에서 안 해 준다고 하면 그만 아니야?”
장무기는 연신 수긍하고는, 분유, 포도당 분말, 비스킷, 카스텔라 따위를 사다 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그는 식권과 현금을 한 움큼 내놓고는, 남는 것은 상우춘이 고생한 만큼의 수고비로 생각해 달라고 설명했다.
“형,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요.”
“자꾸 부탁 부탁 하지 마라. 우리 사이에 뭘.” 상우춘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만 해. 형이 해 줄 수 있는 거면 뭐든지 다 해 줄게.”
“그거 소포처럼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장무기는 조바심을 냈다. “그렇게 해서 양… 양소한테는, 친척이 부쳐준 거라고.”
“난 또 무슨 일이라고.” 상우춘은 웃었다. “그러지 뭐.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 거야?”
장무기는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딴소리만 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상우춘은 약속을 지켰다. 그는 양불회의 외할아버지가 부쳐준 소포라고 말하고는, 안 받으려는 것을 억지로 양소의 품에 욱여넣은 뒤 차를 몰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
장무기가 양불회에게 수액을 놔 주려고 저녁에 들렀을 때 양소는 의문의 소포 이야기를 꺼냈다. “좋은 물건이기는 하던데, 버리려고.” 양소는 그렇게 말했다.
“왜요?” 장무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먹을 수 있겠어?” 양소가 반문했다.
“장인어른이 보내주신 거라면서요?” 장무기는 다급히 덧붙였다. “방금 그러셨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 나를 얼마나 싫어했는데.” 양소는 딱 잘라 말했다. “거기다 귀한 딸까지 꾀어 갔으니, 하루빨리 내가 죽기만 바라고 있을걸.”
“손녀는 아끼는 걸지도 모르죠.” 장무기는 황급히 변명했다. 양소가 정말 식량을 다 버릴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불회는 아프잖아요. 병이 다 나아도 영양가 있는 걸 먹어야 하고요. 식당에서 주는 밥은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 건 먹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요. 불회한테 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모처럼 장인어른이 마음 써 주신 거잖아요.”
양소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하다, 뭔가 깨달은 것처럼 눈을 굴렸다.
“그럴까.” 양소는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네 얼굴을 봐서 받아야겠다.”
장무기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의 한숨과 이완을 양소는 남김없이 포착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7
장무기의 익명 소포는 1969년까지 계속되었다. 1969년에는 세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 번째 사건은 8월에 일어났는데, 소련군이 신강을 침범한 것이었다(1969년 중소 국경분쟁). 농장 방송은 강개하고 격앙된 어조로 소련의 죄악을 성토하고 농장 인민들의 투지를 끌어올렸다. 듣고 있으면 내일 당장 전장에 나가 소련군 병사들과 싸워야 할 것 같았다. 장무기 역시 일촉즉발의 긴장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소련의 국경 침범보다 두 번째 사건이 더 중요했다. 두 번째 사건은 양소가 다친 것이었다.
양불회가 울면서 달려왔을 때 그는 뇌가 하얗게 비어 버렸다. 초조한 마음에 의약품 상자조차 잊고 위생소를 뛰쳐나갔다가 반 넘게 가서야 깨닫고 도로 돌아와 챙겨 들고 다시 뛰었다.
양소는 진짜 다쳤다. 핏자국 위에 피가 묻었고 시퍼런 멍 위에 붉은 멍이 들었다. 피부가 흰 탓에 상처가 더 심각하고 끔찍해 보였다.
“혹시 누구랑 싸우셨어요?” 장무기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비슷해.” 양소가 답했다.
“이렇게 경거망동하실 연배는 아니잖아요.” 장무기는 엄숙하게 말했다.
“많이 컸네, 나한테 잔소리를 다 하고.” 양소는 웃으려 했으나 입가의 멍 때문에 포기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우물우물 말했다. “정당방위야. 물론 그 자식도 멀쩡히 가게 두지는 않았고.”
장무기는 양소의 모든 상처를 신중하게 살피고, 전부 단순 타박상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한 뒤에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소독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내 큰 병원에서 검사받아 보세요.” 장무기는 소독약 뚜껑을 잘 닫았다. “혹시 뼈나 내장을 다쳤을지도 몰라요.”
“응.” 양소는 대답했다. “북경 가면.”
장무기는 양소가 그냥 하는 말인 줄 알고 내부 장기 손상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고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때 양소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년에 불회와 함께 북경으로 돌아갈 거야.”
장무기는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전부 잊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채로 양소를 바라보았다. 모든 감각 기관이 일순간에 매정하게 잘려 나가 버린 것 같았다. 양소를 향한 시선조차 양소가 아니라 허공의 어딘가를 보는 듯했다.
“이렇게 갑자기요?” 그는 느닷없는 충격에서 간신히 한 가닥 제정신을 쥐고 쓰라리게 물었다.
“오늘 그 성가 놈이 당 조직을 대신해서 공표했어.” 양소가 설명했다. “1961년 당 중앙의 우파 개조에 관한 지시에 근거하면 우리는 이제 죄목에서 벗어날 상황이 되었다나.”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장무기는 제 목소리가 너무나 낯설었다. “왜 싸우셨어요?”
“그야 그렇지.” 양소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왜 여기로 왔는지 아니?”
장무기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성가 놈이 고발한 거야.” 양소는 말했다. “양 서기가 잘못된 지시에 따르지 않은 일을 갖고 당의 지도에 반발하는 거라고 고발했어.” 그는 냉소했다. “뭐 양정천이 제 부인을 빼앗아 갔다나. 사적인 원한으로 남을 상부에 고발하다니 정말 형편없는 놈이지.”
양소가 자신의 예전 일을 장무기에게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깨달음이 장무기의 가슴에 아주 잠시나마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일부러 즐거운 듯이 웃었다. “어쨌든 댁으로 돌아가시는 건 잘된 일이잖아요. 고기를 사다가 축하해야겠네요. 이 김에 단백질 보충도 좀 하시고요. 북경에 가시면 꼭 검사받아 보셔야 해요.”
장무기는 상우춘에게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고기는 구할 수가 없어.” 상우춘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요즘 고기가 엄청 귀해. 식권이 있어도 안 팔아.”
“호텔 같은 데에는 있지 않아요?” 장무기는 말했다. “그런 데서 만든 요리도 괜찮아요.”
“파는 데가 없어. 호텔에도 고기 요리가 없다니까.” 상우춘이 말했다. “네가 고기를 가져오면 요리는 해 주지.”
“정말요?”
“정말이야.” 상우춘이 웃었다. “그런데 고기를 어디서 구하려고? 네 허벅지에서 베어낼 수는 없잖아?”
장무기는 위가 묵직해졌다. 아주 무거운 결심을 통째로 삼킨 것 같았다. 식도를 가로막은 결심이 토해지지도 않고 삼켜지지도 않은 채 신선한 공기가 드나드는 것을 방해했다.
밤을 틈타, 상우춘은 철사를 써서 식은 죽 먹듯 식당 문을 비틀어 열었다. 장무기는 머뭇거렸다. “형까지 끌어들이기 싫어요. 정말 같이 가시려고요?”
“답답하게 굴지 마라.” 상우춘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목축대가 키우던 가축들은 간부들이 거의 다 잡아먹었어.”
장무기는 경악했다. “뭐라고요? 전부 사회주의 사회의 공공 자산이라고 했잖아요?”
“규칙이라는 것도 배가 불러야 지킬 수 있는 거야. 굶어 죽을 판에 뭘 어떻게 지켜?” 상우춘은 숙련된 솜씨로 칼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넓었고 하나는 좁았다. 그는 좁은 칼을 장무기에게 건넸다. “전에는 네가 목숨 보전이나 하려고 성실한 척 구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진짜구나. 너 혹시 다 먹은 뒤에 제가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파괴했습니다 하고 자수하려던 건 아니지?”
장무기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빨리빨리 해치우자.” 상우춘은 대단한 장군처럼 엄숙하게 임무를 나눴다. “너는 혈관이 어디 있는지 아니까, 죽이는 건 네가 맡아.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괜찮지?”
장무기는 혈관 절단의 난도를 과소평가했다. 온순해 보이던 양은 땅에 눕혀지자 사지를 비틀며 난동을 부렸다. 어찌나 발버둥을 치는지 칼을 갖다 댈 수가 없었다.
“착하지. 그렇게 아프지 않을 거야.” 장무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칼을 꽉 쥐고 힘주어 양의 목으로 찔러 넣었다.
칼날은 단번에 양의 목을 관통했다. 뜨거운 피가 쏟아져 나와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
“메에….” 헐떡거리던 양은 갑자기 목을 콱 틀어 잡힌 것처럼 빈사의 비명을 질렀다. 뒷다리가 장무기의 품 안에서 몇 번 경련하다 그대로 허공에 굳었다. 새까맣고 빛나던 눈은 여전히 뜨여 있었으나 일순간에 모든 광채가 사라졌다. 완전하게 죽었다.
장무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것을 일부러 죽였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득했다.
그는 줄곧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기쁨도 슬픔도 바라는 것도 없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진짜 자신은 골수 속에 깊이 감춰두고, 온화하고 무해하고 아무 욕심도 없는 새 껍질을 짜냈다. 피범벅으로 뭉그러진 살을 간신히 그 겉가죽 아래 감추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착하고 이해심 많은 가죽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울고 싶었고, 떼를 쓰고 싶었고, 양소더러 떠나지 말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었다. 그는 이제 고작 십여 세의 덜 자란 소년이었다. 부끄럽고 못난 욕심 하나조차 가져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는 이 피부를 찢어발기고 피를 철철 흘리며 길 위를 뛰어 양소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양소의 눈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 순간 장무기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깨달았다. 그는 이제 곧 그것을 영원히 잃게 될 터였다.
“괜찮아?” 상우춘은 장무기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친절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장무기는 호흡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정말 괜찮아요.”
부모님의 초라한 무덤 앞에서도 흐르지 않았던, 앞으로도 영원히 흐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눈물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터져 나와 얼굴에 튄 핏물과 섞이며 가슴을 적셨다.
1970년 하짓날, 양소는 딸 양불회를 데리고 농장을 떠나 기차를 타고 위대한 수도 북경으로 돌아갔다.
수년이 흐른 뒤에도 장무기는 란주 기차역에 가득한 인파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불룩한 짐을 이고 진 사람들이 점점 다가오는 기차의 기적 소리 속에서 배웅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날은 지독하게 더웠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번들거렸다. 이별의 눈물과 땀이 한데 섞여 끈적하게 구불거리며 흘렀다가, 불타는 햇살 아래 금세 증발하며 짠내 자욱한 고뇌의 흔적을 남겼다.
장무기와 조민은 양소 부녀를 기차까지 배웅했다. 양소는 양불회를 안고 차창 너머로 평온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천 리를 배웅해도 끝내는 헤어지는 법이지. 이제 돌아가렴.”
장무기의 속눈썹은 깜박이는 것조차 뻑뻑할 정도로 축축했다. “양소 아저씨….” 그는 제 목소리에 삼 분지 일쯤 섞여 든 오열을 깨닫고 다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더 어색한 기침 소리가 났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럼.” 양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분명 만나게 될 거야.”
장무기는 문득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눈을 뻔히 뜨고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양소가 제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수증기가 공증에서 퍼지며 구불구불 몽롱한 흰색이 되어 그의 시야도 머리 위 하늘도 덮어 가렸다.
“있잖아.” 장무기는 물었다. “기찻길은 두 줄로 돼 있잖아. 언젠가는 두 줄이 만날까?”
“그럴 리가. 기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조민이 웃었다. “레일이 서로 만나면 기차가 어떻게 가?”
장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새까맣게 빛나는 두 줄의 레일을 바라보았다. 레일은 햇빛 아래 검푸르게 빛나며 먼 곳으로 곧게 뻗어, 보이지 않는 끄트머리까지 소리 없이 가 닿고 있었다.
8
1992년 한겨울, 기차 침대칸에서 잠들었던 장무기는 난데없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의 심장은 한 자락 들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적이라고는 없었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뜨거운 땅은 불규칙한 조각들로 갈라져 있었다. 강과 바다가 말라붙은 흔적이었다. 지독하게 뜨겁고 악랄한 이 기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틈새에 자라고 있었다. 꽃받침은 푸르고 꽃잎은 희었으며 가지런하고 깨끗하고 온전하고 무결했다. 뿌리는 땅속에 박혔고 가지는 하늘로 뻗어 그의 심방과 심실을 두르며 더디고도 단단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딩동거리는 알림 소리 속에서 깨어났다. 감정 없는 여성의 기계음이 안내방송을 하고 있었다. “열차가 곧 란주역에 도착합니다. 정차 시간은 5분입니다. 환승하실 승객께서는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장무기는 꿈 속에 깊이 잠겨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였다. 꿈 속 백매화의 있는 듯 없는 듯 서늘한 향이 아직도 코끝에 감도는 것 같았다. 그 아득한 향은 그의 뱃속 장기들에 은은한 아픔을 가져왔다. 작은 동물이 깨무는 것 같기도 하고, 불덩이가 위를 태우는 것 같기도 했다. 온도가 너무 올라서 심폐마저 고온 속에서 수분을 빼앗기고 말라붙어 가는 듯했다.
의사인 장무기는 이것이 무슨 증상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허기였다. 마지막 밥을 먹은 것이 이미 이십여 시간 전이었다.
승무원이 작은 수레를 밀고 가며 귀찮은 듯이 말끝을 길게 끌었다. “빵 소시지 생수 있습니다, 마지막 차입니다―”
장무기는 지갑을 꺼내 들고 작은 소리로 승무원을 불렀다.
장무기는 빵의 포장을 뜯고 커튼 한쪽을 열었다. 이미 몇 번이나 새로 지어진 란주역에는 1970년의 꾀죄죄한 모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네온사인은 밤하늘을 뚫었고 도시의 불빛은 점점이 떨어진 별처럼 빛나서, 마치 처음부터 언제나 이렇듯 고요하고 안온했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그는 란주역의 야경을 보며 빵 두 개를 모조리 삼켰다. 목이 막혀서 눈가가 젖었다. 위는 부드러운 음식물로 채워졌지만 위 이외의 장기들은 여전히 허기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는 이미 불혹에 가까웠으나 세상의 모든 것이 의혹으로 가득했다. 이 공허를 무엇으로 해소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는 생수를 몇 모금 마시고 커튼을 친 뒤 침대에 다시 누웠다. 침대칸의 위생 상태에 신경 쓰지 않고 이불을 끌어당겨 자기 자신을 그 안에 파묻었다.
열차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그는 생수가 텅 빈 제 몸뚱이 속에서 출렁이는 소리를 들었다. 물소리는 금세 가라앉고 그를 대신하듯 기차가 급정거하며 레일과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끼이이익 하고 고막을 아프게 했다. 겨울의 짙은 안개가 사방에서 몰려와 그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찾아갈 곳도 보이지 않았고 처음으로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그의 마음속 기차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고통 같기도 하고 해탈 같기도 한 울음이 가슴에 텅 빈 메아리를 남겼다. 기차는 온 세상에 가득한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 고원을 넘고 언덕을 지나 한겨울로, 모든 것이 얼어붙은 눈과 얼음의 땅으로 달려갔다.
자작나무 숲 노래와 가사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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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잡담과 뒷이야기 타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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