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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의천도룡기(2019)

《의천도룡기 2019》 [팬픽션] 양반대로 개명하려던 양불회 씨가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치다

중국 御风少年张二狗님의 의천도룡기 2019 팬픽션입니다. 현대 배경 AU에 장무기x양소. 쓰신 분께 한국어 번역 게재를 허락받은 글로, 타처 전재는 삼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백도 드라이브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무력함을 뚜렷하게 드러내 주는 일들이 있다. 예컨대 시간의 흐름이라든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라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든가, 절친한 남자 친구가 아버지의 새신랑이 되게 생겼다든가.





양불회는 따스한 집에서 태어나 봄바람 속에서 자랐다.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평생의 슬픔으로 남은 것을 제외하면, 가정환경이 유복해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커리어는 순탄하게 쭉쭉 발전했으며 결혼 생활은 안정적이고 달콤했다. 그야말로 순조롭기 그지없는 인생으로, 부침에서 침이라고는 없는 부부부부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불회 자신은 잘 알았다. 지금의 행복한 생활은 그 자신이 분투해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복을 받고 아버지의 덕을 입었으며 아버지의 그늘 아래 살아온 결과였다. 그는 자신이 분명 전생에 은하계를 하나 구했을 거라고, 그래서 이번 생에 양소의 딸로 태어났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그의 지주였고 뒷배였으며 그가 세상과 맞서 싸워나갈 뱃심이었다. 아버지만 곁에 있어 준다면 어떤 변고가 닥쳐도 두렵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그 변고의 원인이 아버지가 아니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지 않은 경우, 즉 지금 이 순간의 양불회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혀가 뻣뻣이 굳어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아빠, 지금 뭐라고요?” 양불회는 잘못 들었겠거니 싶어서 아버지의 손목을 부여잡고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다시 물었다. “다시 말씀해 보세요. 결혼을 누구랑 하신다고요?”
“왜 그러니, 착한 우리 딸.” 양소는 다년간 쌓인 부녀간의 암묵적 지혜대로 화제를 피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는 딸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 애가 싫어?”
양불회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혼은 반대예요!” 그는 과감하고 명확하게 자신의 태도를 밝혔다.
“왜 반대하는지 어디 얘기해 보렴.” 양소는 양불회가 떼를 쓴다는 듯이, 억지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부드럽게 물었다. “어디가 마음에 안 드니?”
양불회는 양소에게 물러설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젊은 가사도우미가 갖은 교언영색으로 독거노인을 후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는 유의 법률신문 기사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는 화가 치솟아 거의 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걔가 아빠한테 가당키나 해요?!”

양소는 아무 말 없이, 구석 소파에 얌전히 앉아 최대한 존재감을 지우려 시도하고 있는 은리정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양불회는 양소의 시선을 쫓아 눈을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는 자신의 말을 더 엄격히 정정했다. “물론 어울리든 말든, 아빠만 좋으면 그만이긴 하죠. 하지만, 하지만 장무기는 바람둥이라고요! 아빠가 모르셔서 그래요. 소문이 돌았던 여자애들만 해도 이마아아―” 양불회는 양팔을 크게 벌리고는 힘을 주어 한 글자씩 강조했다. “아아안큼이나 있다고요!”
“오호?” 양소는 양불회의 생각처럼 버럭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흥미가 생긴 듯했다. “조민 주지약 주구진 한소소 말고 또 누가 더 있어? 아, 은리는 빼자. 민법상 해당이 안 되니까.”
양불회는 낙담하여 두 팔을 내렸다. 그는 인생의 두 번째 봄을 누리겠다는 아버지의 결의가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미래의 새엄마에 대한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양불회는 이를 꽉 악물고 한 마디씩 또박또박 뱉었다. “민법상 해당이 안 되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불회, 아버…… 양 선생님께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가정불화는 일촉즉발에 이르렀다. 양불회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은리정은 자신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러나 호랑이 같은 양소의 시선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폭발 직전의 아내를 막는 것뿐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부녀간의 분위기를 조정해 보려 했다. “아버…… 양 선생님,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불회는 그냥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오빠는 가만히 있어요!” 양불회는 은리정의 가식적 평화를 끊어 버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 분명히 말하는데 난 그 결혼 반대예요! 한동안 여기 좀 있어야겠네요. 오빠는 같이 있을래요, 아니면 혼자 집에 갈래요?”





양불회는 답 없는 문제를 놓을 줄 모르고 매달리는 고집 센 성품이었다. 근심 걱정 속에서 밤새워 뒤척이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졌을 때야 살짝 졸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편안히 잠들기도 전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 시계 초침 소리보다는 선명했다.
양불회는 소거법을 적용해 보았다. 일단 은리정일 리는 없었다. 가련한 중년남은 장인의 눈빛이 무서워 지난 밤 무당산으로 돌아갔다. 양소일 리도 만무했다. 기다시피 일어나 학교 가는 딸의 아침밥을 차리던 시절 이후 양소는 이 시간에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법적 해결이 필요한 경우뿐이다. 양불회는 주방에서 식칼을 꺼내오기로 했다. 누군지 재수 없게 걸린 도선생에게 이유도 없고 풀 곳도 없는 분노를 다 쏟아부을 셈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방에서 살금살금 바쁘게 일하고 있던 장무기와 마주쳤다.

“뭐해?” 양불회는 장무기 뒤에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장무기는 기겁하고 놀랐다. 양소가 아직 자고 있어서인지 비명을 내지르지는 않았지만 휘둥그레 뜬 눈에 당황이 내비쳤다. “불회구나. 왜 기척도 안 내고 다녀? 깜짝 놀랐잖아.” 그는 똑같이 작은 소리로 불평했다.
“이 새벽에 잠은 안 자고 아빠 집 부엌에서 수상쩍게 뭐 하는 거야?”
“죽 쑤려고.” 장무기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아주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무슨 죽을 벌써 해?” 양불회는 폰 화면을 켜서 장무기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인제 여섯 시야, 오빠.”
“아니야.” 장무기가 설명했다. “삼십 분은 끓여야 하거든.”
양불회는 가스레인지 위의 죽 냄비를 바라보면서 진정성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귀찮지도 않은가 봐.”
장무기가 수줍은 어조로 말했다. “소소(逍逍)가 먹고 싶다는데 뭐가 귀찮겠어.”

양불회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저 얼어 죽을 염병 같은 호칭은 뭐야! 불현듯 자신이 안방에 숨어든 이 족제비와 아버지의 결혼 건으로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게다가 황혼의 사랑에 빠져드는 노년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가사도우미의 손맛에 먼저 굴복하지 않던가. 양불회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땐 일단 배부터 채워준다, 뭐 그런 거야?”
“아닌데. 마음이랑 배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 생각을 왜 해?” 장무기는 천진하게 양팔을 벌리더니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정작 너는 밥도 못 하면서 왜 그래.”
약점을 찔린 양불회는 얼굴을 붉히더니 버럭 소리쳤다. “장무기, 너 진짜 짜증나!”
“쉿― 너 간밤에 잘 못 잤구나?” 장무기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는 양불회도 양소처럼 아침이면 상태가 안 좋은가 보다 싶어 부드럽게 달랬다. “가서 좀 더 자. 밥이 다 되면 깨워줄게.”

자연스럽게 부엌에서 나온 양불회는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 난 오빠랑 아빠가 결혼하는 거 반대하러 왔다고.
그러나 그는 금세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어차피 단숨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길게 보고 생각해야 한다. 안 그래도 장무기가 뚝배기에 말린 대추와 땅콩을 넣는 것을 보았다. 아침부터 먹고 나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다.



1.5

“장무기가 아빠한테 대추랑 땅콩이랑 아몬드랑 마를 넣은 좁쌀죽을 끓여 줬다니까! 말이 되냐고요 이게!”
“몸에 좋을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됐어요?”
“엄청나게 잘못됐죠! 왜 그런 걸 만드냐고요! 입맛 돋우는 죽이 아니라 산후조리 처방 같잖아요!”



2

그날 장무기는 양소네 집에서 잤다. 양불회가 오기 전에는 자기 집처럼 들락날락하며 자주 자곤 했었다. 애인 집에서 자기.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그도 자신에 대한 양불회의 명확한 적의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여기서 잔다고 하면 함축적 도발로 느껴질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여기서 자면 안 되려나요?” 장무기는 신중하게 물었다.
“침대에서 내려간 뒤에 다시 물어봐.” 양소는 그의 진정성 없는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
“불회가 자꾸 이상하게 군단 말이에요. 뭔가 저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은데.”
“아마 아닐걸.” 양소가 말했다. 남의 불행에 신이 난 듯한 어투였다. “재혼 가정에서 자녀와 새엄마 사이에 일어날 법한 보편적 갈등이지.”
“새엄마?” 장무기는 그 말을 되풀이하더니 커다란 눈에 의혹을 가득 띄웠다. “제가요?”
양소는 당연하다는 듯 반문했다. “그럼 누군데?”
“재혼 가정?” 장무기의 시선은 더욱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우리 결혼해요? 처음 듣는 얘긴데요?”
“이제는 들어본 얘기네.” 양소는 들고 있던 책을 덮더니 아무렇게나 베드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여유롭게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거절하려고?”
장무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강렬한 기쁨과 흥분으로 들떴다.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거절해요.”
“그럼 됐네.” 양소는 한 마디로 딱 잘랐다. “자자.”

그러나 양소는 신혼을 맞은 청년의 환희와 유열을 과소평가했다. 장무기는 그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딱히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장무기의 뜨거움과 단단함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달되었을 뿐이다. 보드라운 잠옷 너머 양소는 직관적으로 장무기의 박동을 느꼈다. 아주 환호작약하고 있었다.
“잠이 안 와?” 양소가 어둠 속에서 입을 열었다.
“조금요. 저 때문에 깨셨어요?”
“아니.” 양소가 덧붙였다. “나도 조금 잠이 안 와서.”
늘 점잖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꿀처럼 달콤한 끈적임이 한 방울 섞여 있었다. 너무 미미해서 거의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지만 민감하게 신호를 알아차린 장무기는 귓가가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워낙 정인군자 노릇을 습관처럼 해온 사람이었다. 낡은 집의 그저 그런 방음효과와 양불회가 바로 몇 미터 건너 방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장무기는 망설였다. “안 될 것 같은데…….”
양소는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비웃을 뻔했다. 그는 손을 뻗어 장무기의 잠옷 바지 허리께를 날렵하게 파고들었다. 장무기와 사귄 세월이 얼마던가. 양소는 섹스에 관한 장무기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해도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무기는 시작하기 전이나 끝난 후나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아가씨처럼 굴었다. 조금 암시가 섞인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면 한참이나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일단 본 게임에 들어가면 아예 딴사람이었다. 무슨 사막 탐험대가 전기 드릴로 땅을 뚫듯 양소의 몸속에서 수원을 찾아내려 들었다. 양소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스스로 제 몸을 불 속에 내던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얘는 좋다는데.” 양소는 잔뜩 힘이 들어가 사인만 기다리고 있는 열기의 근원을 움켜쥐고 아래위로 살살 문지르며 엄숙하게 말했다. “얼른 끝내. 끝내고 자자.”
그러나 양소는 청춘 남성의 왕성한 성욕도 과소평가했다. 그가 온 신경을 기울여 남자친구에게 핸드잡을 해 주는 사이 그의 남자친구는 이미 베개 밑에서 윤활제를 꺼내 들고 숨 쉬듯 익숙한 손길로 아래쪽을 파고들고 있었다.
“안 돼.” 양소가 말했다. “내일 양 선생님이랑 교수위원회 회의 있어.”
양소와 사귄 세월이 얼마던가. 장무기는 양소가 침대 위에서 하는 말은 기본적으로 음소거하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 된다, 안 한다, 꺼져, 입으로는 뭐라고 하건 진지하게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심하기 그지없는 준비 작업을 마친 뒤 손쉽게 양소의 두 다리를 벌렸다. 살짝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매끄럽고 뜨거운 도원향으로 순조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윽…… 내일은 진짜 일 있다니까.” 양소는 치받혀서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막으려 들기는커녕 몸에 힘을 빼고 장무기가 더 깊은 곳의 풍경을 온몸으로 느끼도록 이끌었다.
“제가 대신 휴가 내 드릴게요.” 장무기는 그 틈을 타고 더 깊이 밀고 들어갔다. 그는 침대 위에서만 아주 조금씩 드러내곤 하는 거친 태도로 말했다. “제 앞에서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양소는 눈을 굴리더니 교활하게 웃었다. “그거야 너 하기에 달렸지.”



3

양불회는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일어나 대충 씻고 나왔다가 마찬가지로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양소를 식탁 옆에서 마주쳤다. 낙낙한 홈웨어를 입은 양소는 마침 고개를 숙이고 폰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드러난 목덜미와 가슴팍에 점점이 붉은 흔적이 옅게 남아 있었다. 식탁 앞에 앉은 모습이 달콤한 풍요에 푹 잠겨 한창 무르익은 과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양불회는 그야말로 정신이 아찔하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차라리 눈을 뽑고 싶었다.
“양소 씨, 우리 진지하게 얘기 좀 하죠.”
양불회는 첫 번째 공판 개시를 선언하며 엄숙한 태도로 양소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 양불회 씨.” 양소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장무기, 씨한테, 얼마나, 뛰어난, 장점이, 있기에,” 양불회는 이제 막 상호 교류 테스트를 시작한 AI처럼 한 마디씩 끊어 가며 말했다. “선생님께, 그와, 결혼하겠다는, 강렬한, 소망을, 불러일으켰죠?”

TV에서 시끄러운 말다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년의 남성이 집문서에 가사도우미 이름을 추가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발생한 가정불화 사건이었다. 늙은 아버지는 한쪽에서 눈물을 흘리고, 딱 봐도 건드리면 안 될 것처럼 날카롭게 생긴 딸이 또박또박 가사도우미의 죄목을 열거하고 있었다. 부녀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사건은 화해한 부녀가 서로 끌어안고 통곡하는 대단원으로 막을 내렸다. 양불회는 하마터면 욕설을 퍼부을 뻔했다. 양소는 가벼운 헛기침으로 딸의 주의를 끌었다.
“퍽 첨예한 문제를 제기하는구나.” 그는 말했다.
“논점 이탈하지 마세요.” 양불회는 양소의 음모를 꿰뚫어 보았다. “아빠도 아시는 거 아니에요? 장무기는 껍데기 빼면 쓸 만한 구석이라곤 없는 쓰레기라는 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네 눈의 쓰레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보물일 수도 있단다.” 양소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네 보물이 남의 눈에는 쓰레기일 수도 있고.”
“양소 씨, 은근슬쩍 남을 비방하지 말아 주실래요?”
“양불회 씨, 왜 그게 본인 이야기라고 생각하시죠?”

양불회는 대단히 후회했다. 정신이 나갔던 게 틀림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양소와 말싸움을 하려고 하다니. 대학에서 양소가 가르치는 과목은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주의 개론이었다. 학교 토론 동아리 지도교수를 맡고 있기도 했다. 교묘하게 상대를 뒤흔드는 언변 앞에서는 이만 명의 양불회가 달려들어도 적수가 못 되었다.
“아오, 아빠!” 필살기를 꺼내든 양불회는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장무기는 바람둥이라니까요. 아빠가 맘고생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착한 우리 딸, 이렇게나 아빠 생각을 해 주다니 아빠는 정말 감동했다.” 양소는 선선히 웃으며 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빠가 왜 맘고생을 하겠어. 그간 아빠 여자친구 남자친구라며 염문설이 돌았던 사람들 수가 무기보다 적었니?”



3.5

“아빠 말이 맞아요. 남자친구들은 그렇다 치고, 옛날 엄마 지도교수님하고도 스캔들이 있었는데.”
“그럼 아버님이랑 멸절도 사귄 적이 있다고요? 사실 우리 선후배들도 그렇고, 지도교수님도 꽤 궁금해하셨거든요.”
“은리정, 정신 안 차릴래요? 뒷소문에 정신 팔려서 장인도 못 알아봐? 거기다 선후배랑 선생님까지 다 같이? 어?”
“무당이 다 그런 걸 어떡해요. 원래 온갖 소문에 민감한 곳이니까.”



4

그날 양소는 아주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장무기는 아침밥을 할 필요가 없어서 늘어지도록 잤다. 그래도 양심이 아주 멸종한 것은 아니어서, 밥을 하지는 않았지만 배달을 시켜 놓았다. 양불회 몫으로도 밀크티를 주문했다.
시시각각 함정을 경계해야 하는 양소와의 대화에 비하면 장무기와 이야기하는 것이 편했다. 일단 성실해서 뭐든 묻는 대로 답했으므로 아무거나 질문해도 새로운 수확이 있었다. 그리고 어쨌든 나이도 비슷하니 통하는 화제가 많았다. 웨이보 실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었고, 배우자로 아버지 같은 사람을 선호하는 취향에 관해서도 대화해 볼 가치가 충분했다.

“장무기, 진짜 이해가 안 간다고.” 양불회는 밀크티 빨대를 깨문 채 우물우물 말했다. “우린 친구고 남매잖아. 아빠더러 양소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했었잖아. 어쩌다 갑자기 아빠랑 그런 사이가 된 거야?”
“미안해, 불회야. 내가 의리도 몰라서 그런 게 아니야.” 장무기는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다 소소(逍逍)가 너무 매력이 넘친 탓이지.”
양불회는 지독하게 몸서리를 치더니 혐오로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오빠!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 사람 좀 살려라! 이제 좀 믿음이 간다. 그렇게 부르는데도 패 죽이지 않은 걸 보면 아빠가 정말 널 사랑하긴 하는구나.”

“그래도 결혼은 반대야.” 양불회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평온하게 말했다.
“왜?” 장무기는 참을성 있게 물었다. “내 어디가 부족한 것 같아?”
“부족한 게 없지. 그러니까 여자애들이 다 오빠를 좋아하는 거야.” 양불회가 말했다. “지금 아빠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란 건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그 진심이 오래갈 거라고는 믿지 못하겠어. 오빠는 아직 젊잖아. 언젠가 아빠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 가 버릴지 누가 알아?”
장무기는 공연히 입만 뻐끔거렸다. 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간의 혁혁한 전과를 생각하면 감정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에는 공신력이 없었다.
“아빠는 정말 고생했어. 많이 힘들어했고.” 양불회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거란 말이야. 이해하겠어?”
“나도 알아.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날 믿기 어렵겠지.” 장무기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너도 내가 맹세했으면 좋겠어?”
어라, 이상하다. 왜 ‘너도’지? 장무기는 순간 생각했다.
“네 걱정도 다 이해해. 혹시 맘이 안 놓이면 언제든 와서 감시해도 좋아.” 장무기는 휴지를 뽑아 양불회에게 건네며 신실하게 말했다. “정말 내가 바람을 피우면 네 마음대로 처리해. 죽이든 삶든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이제 됐어, 숙모님?”
“내가 안 된다고 해 봐야 헤어질 것도 아니잖아.” 양불회는 눈물을 닦았다. “정말 아빠를 배신한다면 오빠네 아저씨들이랑 할아버지까지 다 데리고 와서 능지처참해 버릴 줄 알아. 그때 가서 원망하지 마.”
“좋아.” 장무기는 정중하게 답했다. “내가 만일 소…… 양 선생님을 배신하면, 숙부님 백부님들더러 날 아주 다져서 만두를 빚어 소…… 양 선생님한테 드리라고 할게.”
“그래도 새아빠 소리는 못 해!” 양불회는 얼굴을 굳히려 노력했다. “새엄마도 안 돼!”
“호칭은 각자 알아서 하자.” 장무기가 말했다. “넌 오빠라고 부르고 난 딸이라고 부르면 되겠네.”
“꺼져 인마.”



5

따님과 남자친구 간의 소리 없는 전쟁에서 양소는 어느 편도 들 생각이 없었다. 애초부터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 싸움이 다 그렇지 않은가. 비 갠 뒤의 하늘이 더 푸른 것처럼 저희끼리 싸웠다가 친해졌다가 하는 법이다. 어른이 끼어 들어봐야 더 야단법석이 날 뿐이었다.
그래서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양불회와 장무기가 화기애애한 단짝처럼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어도 양소는 놀라지 않았다.

“아빠 오셨어요.” 양불회가 말했다. “오빠, 아빠 물 좀 떠다 드려.”
“알았어, 숙모님.” 장무기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양소의 예상을 다소 벗어난 전개였다. 속에서 파도가 출렁였지만 그는 평온하고 말끔한 얼굴로 물었다. “둘이 뭐해?”
“무기 오빠는 내 남편의 선배의 아들인데 숙모라고 불러도 이상할 거 없잖아요.” 양불회가 말했다. “맞다, 두 분 결혼은 반대 안 하기로 했어요. 식장에서 나한테는 뭐라고 부르실 거예요?”



6

“결혼은 그만두는 게 낫겠다.” 양소가 말했다.
“왜요?” 경건한 자세로 그의 다리 사이에 꿇어앉아 빨았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하던 장무기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이 타이밍 이 상황에 이 화제라니, 자신의 기교에 불만이 있다고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너와 결혼하면 은리정보다 항렬이 낮아져. 대단히 불쾌한 일이지.” 양소는 젊은이의 머릿속에 휘몰아친 수백 수천 근심 걱정은 아랑곳없이 느긋하게 말했다. “장삼풍에게 청혼해야 할 것 같아.”
“할아버지한테 그러지 마시고 저랑 얘기해요.” 장무기는 큰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되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저는 힘든 일도 잘 견디고 근면 성실한 데다 적극적인 성격에 배우기도 좋아하니까.”
양소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말 뻔뻔스럽기도 하지.”
그는 장무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했다. “그럼 어디 한 번 제대로 시험해 봐야겠네. 실망시키면 안 된다,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