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御风少年张二狗님의 의천도룡기 2019 팬픽션입니다. 현대 배경 AU에 장무기x양소. 쓰신 분께 한국어 번역 게재를 허락받은 글로, 타처 전재는 삼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백도 드라이브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1
동지가 지나자마자 동북은 살을 저밀 듯한 한기의 칼날로 가득 찼다. 저녁 여섯 시가 지나기도 전에 드넓은 동북 평원이 짙은 밤빛으로 뒤덮였다. 도시를 유지하며 굴러가던 기계들의 굉음은 돌연히 멈췄다. 찻길 양편의 상점 주인들은 하나같이 불을 끄고 셔터를 내리며 인사를 건넸다. 이제 세상은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켜질락 말락 하는 가로등 아래 텅텅 빈 버스가 조용히 도로 위를 굴렀다. 간혹 드물게 승용차의 전조등이 희뿌연 안개를 뚫고 빛나다가 돌개바람처럼 길 끝으로 사라졌다. 바람이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도시는 퍼렇게 굳은 얼굴로 다시금 죽음 같은 혼돈에 빠져들었다.
동북은 본래 겨울이면 바람이 흔한 곳이다. 올해 겨울바람은 유독 대단했다. 하늘과 땅 사이 빈 곳마다 바람과 그 바람이 말아 올린 낙엽이며 쓰레기로 가득했다. 호텔을 나서려던 양소는 이러다 저 울부짖는 바람에 휩쓸려 떠밀리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주저 없이 밤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살을 에는 찬바람은 그를 흔들지 못했다. 잎이 다 시든 교목을 꺾을 수 없는 것처럼. 그는 벌써 근처 길에 익숙해졌다. 좁은 골목을 하나씩 지나고 낮은 처마를 줄줄이 스치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굴뚝 두 개가 보였다. 하얼빈 광명철강 제1공장의 굴뚝이었다. 본래는 매일 지칠 줄 모르고 푸르스름한 잿빛 연기를 토해냈지만, 지금은 그저 고요한 공장 터가 되어 깨진 기왓장만 남았다. 양소는 길에서 문득 그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시공을 뛰어넘어 또 다른 자신을 마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처지로 전락했을까. 그들 자신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양소는 그런 비감에 젖어 있을 틈이 없었다. 그에게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딸이 있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건물 입구에서 양소는 막 외출하려던 맞은편 집의 부부와 마주쳤다. 남편은 낡은 28 자전거를(28인치 바퀴 자전거, 이 시기 일반 가정의 생활 필수품) 밀며 맥없이 밤을 향해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아내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남편 뒤를 바싹 붙어 따라갔다. 자각 없는 씁쓸함이 그들의 입가에서부터 눈 아래, 눈매의 자잘한 주름까지 가득히 차올라 차가운 공기 속으로 소리 없이 퍼졌다. 그 잠깐의 마주침만으로도 양소는 혀끝이 떫어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희미하고도 싸늘한 쓴맛이야말로 삶을 버티기 어렵게 만드는 법이다.
“이제 왔나 봐요, 양씨.” 남편 쪽이 먼저 양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한때 같은 공장 동료였지만 인사나 주고받았을 뿐 친하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느릿했다. 마치 말소리가 북풍에 찢겨나가 허공으로 내팽개쳐질까 봐 경계하는 듯했다.
“네.” 양소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세요?”
“예.” 남편은 짧게 대답하고는 더는 말이 없었다. 바람이 그들 사이를 울부짖으며 지나쳤다.
아내가 말없이 자전거 뒷자리에 앉은 뒤에야 남편은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희는 가볼게요.”
양소는 한숨에 목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심해요.”
남편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시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전거는 견디기 어려운 무게에 신음하며 금세 밤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양소는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섰다. 복도는 길거리보다도 어두웠다. 순식간에 양소는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그는 실수로 굴러떨어지지 않으려고 끈적이는 계단 난간과 먼지로 가득한 벽을 조심스레 더듬거렸다. 복도의 등은 망가진 것도 있고 없어진 것도 있었으나 아무도 고치려 하지 않았고,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여기 사는 사람 모두가 당연한 양 익숙하게 여겼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어둠과 동행했던 것처럼, 단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러나 양소는 줄곧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는 약간 야맹증이 있었다. 밤이 되면 아예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불편했다. 열쇠를 열쇠 구멍에 꽂아 넣는 데만도 퍽 힘이 들었다. 다행히 대부분은 그가 문을 열 필요가 없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솜옷 안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더듬어 꺼내자마자 문 너머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현관 중문이 열리더니 양불회가 바깥 철문에 뚫린 꽃무늬 너머 더부룩한 머리를 내밀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빠?”
“응, 딸.” 양소는 대답했다. “문 열어 줘.”
“응.” 양불회는 낭랑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밖으로 잠긴 문을 열고 아버지를 집에 들였다. “아빠, 일단 찬 기운 좀 가시면 같이 밥 먹어요. 난로에 죽 데워 놓을게요.”
“그래. 잠깐만 기다려.” 양소는 솜옷을 벗고, 호텔에서 가져온 채소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아빠가 뭣 좀 만들 테니까 다 되면 같이 먹자.”
“그럼 내가 도와줘야지.” 양불회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엌으로 왔다. 양소가 냄비를 데우는 동안 찬물로 감자와 배추, 무를 꼼꼼하게 씻었다. 드물지도 비싸지도 않은 채소들이었다. 겨울철 동북에서는 거의 아무 데서나 볼 수 있었다. 부녀가 근 보름 동안 끼니마다 먹은 음식 재료이기도 했다. 밥이 귀한 줄 잘 아는 양소조차 보기만 해도 질려서 입맛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양불회는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채소를 씻는 손은 찬물에 젖어 새빨개졌다. 그 빨간색이 아픈 사람은 양소뿐인 것 같았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별 뜻 없는 것처럼 물었다. “내일 며칠이지?”
“내일?” 갑작스러운 질문에 양불회는 살짝 멍해졌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다 망설이며 대답했다. “25일인가?”
“벌써 25일이야?” 양소는 한탄했다. “정말 시간도 빠르네. 눈 깜박했더니 벌써 이렇게 됐어.”
“그러니까요. 금방 신정이에요.” 양불회가 경쾌하게 답했다. “이제 금방 방학이고.”
“이제 곧 새해구나.” 양소가 말했다. “내일은 시장에 가서 고기랑 생선 좀 사 와야겠다. 우리도 식생활을 좀 개선해야지. 새해 기분도 낼 겸.”
“제 의견은 반대네요, 아빠.” 양불회는 배춧잎을 찬물에서 건져 물기를 털고서 가지런하게 도마에 쌓아 두었다. 그는 감자와 무 껍질을 벗기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왜 자꾸 고기 산다는 소리를 해요? 고기가 뭐 그렇게 맛있다고. 어쨌건 난 별로예요. 배추랑 무가 더 좋아요. 맛있고 영양가 있고.”
양소는 원래 장단을 맞춰 웃어 주려고 했으나, 목구멍에서 비리고 들척지근한 눈물이 울컥 치솟는 것 같았다. 양불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기침을 했다. 식칼을 쥐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파를 잘게 썰고 마늘을 다졌다. 기계처럼 칼질하는 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진 뒤에야 웃음 섞인 어조로 느긋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 말을 하면서 침만 안 흘렸어도 아빠가 믿었을 텐데.”
양불회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인정사정없이 아버지의 하찮은 속임수를 지적했다. “그런 말에 넘어가면 내가 바보게? 그 수법으로 십여 년을 속였잖아요.”
양소는 멍해졌으나, 얼른 우울한 듯이 탄식했다. “애들이 머리가 굵어지면 속질 않는다니까.” 그는 빈손으로 양불회의 복슬복슬한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됐다. 더 할 일 없으니까, 그릇이랑 젓가락 갖다 놓고. 다 볶으면 밥 먹자.”
이십 분 후 그들은 밥 먹을 준비를 마쳤다. 양소가 죽을 덜고 나자 양불회는 책상에 놓여 있던 탁상 달력을 무슨 보물 바치듯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왜 그래?” 양소는 본능적으로 몇 센티미터쯤 뒤로 고개를 젖혔다.
“아니, 그냥 보여주려고요.” 양불회는 집요하게 다시 몇 치쯤 내밀었다. “오늘 24일 맞아요.”
“아, 그러네. 역시 우리 딸은 기억력이 좋아.” 어둡고 누런 불빛 아래, 양소는 열심히 얇은 종이 위의 저질 잉크를 읽어냈다. 달력의 왼쪽 아래 귀퉁이에 검푸른 색으로 삐뚤빼뚤 ‘은(殷)’ 자가 쓰여 있었다. 양소의 글씨가 아니었다. “잠깐만. 딸, 이게 뭐야?” 그는 글자를 가리키며 의아하게 물었다.
“응?” 양불회는 달력을 뒤집어 살펴보았다. “아, 이거. 어디서 전화가 왔었어요. 아빠 친구인데 은씨라고. 내일 집에 들를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의논할 일이 있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가 친구가 어딨어. ―달력 도로 갖다 놓고, 손 씻고 밥 먹자.” 양소는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용의자를 확정했다. 잠시 생각한 그는 다시 당부했다. “만일 아빠가 집에 없으면 누가 와도 문 열어 주지 마. 알겠지?”
“알 겠 습 니 다―”
2
누군가 문을 두드렸을 때 양불회는 거실의 장홍(長虹) 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중앙전시대 1번의 만화성을 보고 있었다. 다급하고 사납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부엌에서 잉어를 손질하고 있던 양소마저 놀랐다. 앞치마를 두른 양소는 생선 비늘이 붙은 칼을 쥐고서 양불회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했다. 그는 나무로 된 중문을 열고 또렷한 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양씨, 집에 있었어? 문 좀 열어 줘.” 찾아온 사람의 목소리는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나, 나 은야왕인데. 기억 안 나? 은천정 아들. 몇 년 전에 아버지랑 같이 왔었잖아. 이사 안 갔구나. 정말 다행이네.”
‘은천정’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양소는 일단 상대방이 은야왕을 사칭한 강도라는 의심은 접어두었다. 그는 칼을 쥔 채 문을 열어주었다. “아, 은천정 씨 아들.” 실내의 불빛에 기대어 양소는 은천정과 조금 닮은 은야왕의 눈매를 훑어보다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네. 일단 들어와. 밖에 추우니까.”
은야왕은 얼른 끄덕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복도를 향해 말했다. “이리 와. 얼른.”
“응?” 양소는 미간을 좁혔다. 그도 은야왕을 따라 바깥을 내다보았으나 새카만 덩어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
“우리 조카인데― 그렇지, 오는 길에 음식점에서 요리 좀 샀어. 술이랑. 이따 같이 마시자고.” 은야왕은 양소를 향해 비닐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같이 술 마신 지도 오래됐잖아.”
좁은 복도에서 느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간에 나타난 사람은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이었다. 소년도 두 손 가득 뭔가를 들고 있었다. 그는 걷다 뛰다 하면서 은야왕 뒤를 쫓아왔다. 양소가 들어오라고 하자 얌전히 들어와서 어색하게 거실 구석에 서 있었다.
“앉아.” 문을 단단히 잠근 뒤 돌아선 양소는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소년의 등을 두드렸다. “내 집이 그리 대단한 곳도 아니고, 네가 보초까지 설 건 없어.”
소년의 귀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어눌하게 대답하더니 역시 어색하게 소파에 앉았다. 두 손은 무릎에 딱 붙이고 등은 곧게 세운 채였다.
“녀석이 뻣뻣하기는.” 은야왕은 짐짓 화난 것처럼 소년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양소에게 말했다. “원래 애가 이래. 말주변도 서툴고, 대문 연 적 없고 중문 건넌 적 없는 아씨처럼 군다니까.”
“애들이야 다 낯가림을 하지. 우리 딸도 그래.” 양소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물을 따라 주면서 다짜고짜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
“말하는 것 좀 봐. 그냥 보러 오면 안 되나?” 은야왕은 얼른 덧붙였다. “그야 일이 좀 있어서 온 거긴 한데.”
양소는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를 보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불회야, 거기 오빠랑 같이 만화 보고 있어. 아빠는 아저씨랑 상의할 일이 있어서.”
양불회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어리바리한 척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얼른 일어났다. 우선 은야왕에게 인사를 하고는 소파에 바늘방석이라도 깔고 앉은 듯한 소년에게로 갔다가, 보자마자 놀라서 물었다. “어, 3학년 장무기 아냐?”
‘3학년 장무기’도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너는…… 양불회구나.”
“응?” 양소는 놀라서 소년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이야?”
“아뇨. 그냥 전교생 대회 때 한 번 봤어요.” 양불회가 말했다. “전국 미술대회에서 금상 받았거든요. 상 받은 사진이 지금도 학교에 걸려 있는데.”
“아하, 예술가였구나.” 양소가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약간 온화한 웃음기가 담겨 있어 그다지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다. 장무기는 그 살짝 놀리는 듯한 칭찬에 얼굴을 붉혔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거렸다. 결국은 양불회가 그를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장무기를 끌고 막 방송이 시작된 대풍차(大風車, CCTV 1에서 방영하던 청소년 프로그램)를 보러 갔다.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얼룩덜룩한 빛깔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뺨의 붉은 기를 덮어 주었다. 장무기는 조금 안심했다. 현란한 빛이 내심의 불안까지 파묻어 가려 주는 것 같았다.
“말해 봐.” 있으나 없으나 한 인사치레는 생략하고 양소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
“일이, 진짜 일이 있긴 한데. 잠깐만. 어디부터 얘기해야 하나.” 은야왕은 웃는 얼굴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양씨, 부탁 하나만 할게.”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우리 조카 좀 한동안 봐줄 수 있을까?”
“응?” 양소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마치 은야왕의 부탁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뭐라고?”
“피차 아는 사이니까 나도 그냥 터놓고 말할게. 내 동생 소소 말이야. 공무원이잖아. 요새 좀 일이 생겼는데 영 해결이 어려워. 이러다 잘 안 되면 들어가게 생겼거든. 아버지랑 내가 북경에 아는 사람 좀 찾아서 빼내 보려고 하는 중이야.” 은야왕은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무기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내년이면 대입시험도 쳐야 하잖아. 그러니까, 좀 물어보려고 왔어. 반년만 집에서 맡아줄 수 있나 해서. 내년 여름 되면 깔끔하게 싹 걷어서 사라져 줄게. 절대 두 사람 사는 데에 방해되는 일 없을 거야.”
양소는 진지하게 다 듣고 나서 그의 등 너머 장무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좀 편안해져서인지 장무기의 목과 어깨는 힘이 빠져 늘어져 있었다. 등허리만은 언제든 쏠 수 있는 활처럼 팽팽했다. 연약하면서도 무구해 보였다. 양소는 눈길을 거두고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은야왕을 보았다. “다 준비를 하고 왔나 보네.”
“그럴 리가 있어? 물어보러 온 거라니까. 안 되면 그냥 가야지.” 은야왕이 변명했다. “근데 생각해 봐. 조카랑 불회가 마침 학교도 같고. 둘이 아침저녁 같이 다니면 너도 맘이 놓일 것 아냐, 안 그래?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둘이 같이 다니면 걱정이 덜 되지.”
양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는 듯했다. 말이 없을 때 그의 깊은 눈매는 고요한 겨울의 마른 우물처럼 보이곤 했다. 천장의 등이 미간에 자그만 그림자를 드리워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은야왕은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도 없었고, 이 균형을 깨뜨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컵을 들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는 것으로 내심의 초조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 양소의 얼굴이 드디어 얼음이 녹아내린 듯 맑아졌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고 은야왕에게 물을 따라주며 느긋하게 답했다. “괜찮아. 기껏해야 수저 한 벌 더 놓는 건데 뭐. 그런데…….” 물이 가득 찬 주전자가 탁자에 부딪히며 꽉 막힌 소리를 냈다. 그는 강적을 맞이한 양 긴장하는 은야왕의 얼굴을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우리 집 상황 알잖아. 애가 그런 고생을 견딜 수 있을까.”
“그건 걱정하지 마.” 은야왕은 한숨 돌렸다. 그는 양소가 후회할까 봐 얼른 말을 이었다. “우리 조카는 개보다도 손이 안 가는 애야. 그냥 밥이나 주면 돼.”
양소는 다시금 눈을 들어 얼렁뚱땅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장무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하자.”
이리하여 장무기는 정식으로 양씨 집안에 들어와 양씨네 식구가 되었다. 처음 양소는 느닷없이 집에 나타난 청소년에게 약간의 의심을 품고 있었다. ―남자아이의 아버지 노릇을 한 적은 없지만, 그 자신도 한때는 십 대 소년이었다. 청춘 소년의 충동과 성급함에 대해 더없이 잘 알았다― 비록 은야왕이 재삼 본인의 인격과 신용을 걸고 보증하긴 했으나 그의 의심과 걱정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장무기는 정말 순하고 얌전한 남자아이였다. 약간 답답하고 어눌한 구석은 있었지만 장점이 훨씬 더 많았다. 말도 잘 듣고 어른스럽고 성실했다. 집에 온 첫날 밤, 장무기는 두꺼운 소가죽 봉투를 양소에게 건넸다. 양소는 그것을 받자마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차렸지만,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이게 뭐야?”
“어머니가 꼭 전해 드리라고 했어요. 생활비예요.” 장무기는 들은 그대로 설명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힘드실 텐데, 제가 공짜로 먹고 자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양소는 웃었다. 그는 봉투를 열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장무기의 품에 다시 넣어 주었다. “갖고 있어.”
그의 행동은 장무기를 곤혹에 빠뜨렸다. 그는 봉투를 든 채 놀란 눈으로 양소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양소는 이 문제로 오래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잘 갖고 있어.” 그는 장무기의 어깨를 가벼이 토닥였다. “잃어버리지 말고.”
장무기는 일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의 예상대로라면 수입이 불안정한 양소는 희희낙락하며 돈을 받아들고, 혹시 가짜는 없는지 지폐를 한 장 한 장 세어 보아야 했다. 그러면 그는 수없이 연습한 대로 ‘모자라면 말씀하세요, 어머니에게 더 달라고 할게요.’라고 할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양소가 눈길 한 번 주고 만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는 봉투를 든 채, 마치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양소는 장무기의 낙담을 민감하게 포착했다. 그는 그저 소년이 처음 온 곳의 낯선 생활 환경에 얼른 녹아들 수 없어 겁을 먹었겠거니 생각했다. 몇 마디 위로해 줄까 싶었지만, 장무기를 껴안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을 해 줄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됐어. 천천히 좋아지겠지.
장무기가 먹고 입는 것은 따로 신경 쓸 게 없었다. 하지만 자는 것은 좀 생각해 봐야 했다. 양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장무기를 거실에서 재우는 것이었다. 소파에서 잘 수도 있고, 접이식 침대를 하나 놓을 수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장무기와 함께 자는 것이었다. 양소는 모범 병사처럼 단정한 장무기를 힐끗 보고는 금세 결정을 내렸다. 장에서 베개를 하나 꺼내왔을 때까지도 장무기는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레 확인했다. “아저씨, 정말 같이 자도 괜찮으시겠어요?”
양소는 베개를 제 베개 옆에 내려놓고, 장무기를 위아래로 훑었다. “몽유병 있니?”
장무기는 고개를 저었다.
“이를 갈거나 잠꼬대를 해?”
장무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 확신 없는 투로 말했다. “아마 안 할 거예요.”
양소는 또 표정 없이 장무기를 살펴보더니, 한참 후에야 짐짓 놀란 듯이 물었다. “혹시 여자애였어?” 그래 놓고 정작 자신이 먼저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확 새빨개진 장무기를 보며 말했다. “됐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얼른 자자. 내일 학교 가야지.”
장무기더러 얼른 자라고 했지만 정작 양소 자신은 잠이 오지 않았다. 기효부를 제외하면, 그는 지금껏 다른 사람과 한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없었다. 홀로 깊은 밤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데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기효부는 이미 벽에 걸린 네모난 틀 속 말 없는 그림자가 되었지만, 지금 제 곁에 누운 사람은 살아 있었다. 조심스레 얕게 쉬는 숨소리, 평온하게 약동하는 심장 소리. 그는 어색하게 돌아누웠다가 옆으로 누워 있던 장무기의 얼굴과 딱 마주쳤다. ―이미 잠든 것 같았다. 천진한, 한 번도 상처받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달빛이 커튼 틈새로 새어들어 그의 젊고 빛나는 얼굴로 떨어졌다가 흐리고 얄팍한 먹구름처럼 엉겼다. 양소는 까닭 없이 봄이 떠올랐다. 눈과 얼음이 녹고, 강물이 잔잔히 흐르고, 얼어붙었던 땅이 풀려 진흙에서 자라나는 생명이 떠올랐다. 그 순간 마음이 흠뻑 녹고 말았다.
3
1998년의 마지막 밤, 양소는 하얼빈 제1병원 응급실에 있었다. 그는 다급한 걸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군복 외투를 걸친 채 팔에 면봉을 문지르고 있던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치기까지 했다. 지나가던 간호사들에게 여러 번 물어보고서야 응급실 위치를 알아냈다. 장무기는 퍼런 코와 부은 얼굴로 응급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당직 의사가 묻는 모든 질문에 얌전하게 대답했다. 어두운 표정이 마치 돌아갈 집도 없이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응급실 문간에 선 양소를 발견한 장무기의 눈에 일순 빛이 돌았다. 그는 입술을 몇 번 우물거렸지만,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 학생 가족 되시나요?” 당직 의사는 진료기록을 넘겨 가며 물었다.
“예. 가족이에요.” 양소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설명 좀 드릴게요.” 당직 의사는 의학 용어를 줄줄 쏟아놓았다. “……타박상은 처치 끝났으니 감염 위험은 없을 겁니다. 어지럼증이나 구토 증상도 없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뇌진탕 가능성은 배제해도 좋고요. 이따 가시면 돼요. 집에 가시면 일이 주 정도 더 지켜보세요. 혹시 어딘가 불편하면 얼른 오셔야 합니다.”
응급실에서 나온 둘은 병원 복도의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 한동안 앉았다. 이마에 거즈를 붙인 장무기는 머리를 푹 숙이고 멍하니 있었다. 그 때문에 눈가에 아주 조금 부드러운 난폭함이 묻어났다. 복도의 등이 그의 정수리에 희고 초췌한 빛을 비췄다.
“안 아파?” 양소가 먼저 둘 사이의 고요를 깨뜨렸다.
“괜찮아요, 아저씨.” 장무기는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구체적인 상황은 파출소 경찰한테서 들었다.” 양소는 옆으로 몸을 돌려 장무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양불회의 아빠로서, 너한테 감사해야겠구나.”
장무기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느닷없이 주목을 받았다는 당황이 동공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에요, 아저씨. 정말 그러실 것 없어요. 애초에 제 잘못인걸요.” 그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비틀어 쥐며 딱딱하게 말했다. “제가 아니었으면, 불회도 그 애들과 마주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 뭘 잘못했는지 말해 볼까?”
그의 어조는 평온해서, 잘못을 추궁하려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맥없는 옷자락을 움켜쥔 장무기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전전긍긍하다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제가…… 제가 그런 애들과 친구가 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건 친구가 된 게 아니지. 자선 활동을 한 거야.” 양소는 소리 없이 웃었다. “돈이 있으면 다른 걸 하고 놀지, 그런 녀석들이 먹고 노는 데다 돈을 대 줬어? 왜, 젊은 나이에 벌써 아빠가 되는 즐거움을 체험해 보고 싶어서?”
장무기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코를 훌쩍이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양소는 줄곧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타조처럼 고개를 처박고 피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양불회를 지키려다 다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무지 심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의 가스관을 올려다보면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양 말했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맞았건, 돈을 뺏겼건, 선생님이랑 어른에게 이야기를 해. 길거리에 표어도 잔뜩 붙어 있잖아. 어려운 일이 있으면 경찰에게 오라고.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어린애가 뭐든 혼자 감당할 수 있으면 나 같은 어른은 뭐하러 있겠니?”
“하지만 제가 불회도 못 지켜주면…….” 장무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슴 속 아득한 허공을 한참 떠돌았던 것처럼 울적하고 쓰라렸다. “아저씨가 절 돌봐 주는 게 헛일이잖아요? 저는 그냥…… 짐덩이가 돼 버리는 거잖아요?”
“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양소는 좀 어이가 없었다. “일단 가지 말고, 우리 그거에 관해서 얘기 좀 하자. 잠깐 있어 봐.” 그는 솜옷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가벼운 금속성이 연이어 울렸다. 양소는 연한 녹색의 와하하(娃哈哈) AD 칼슘 우유와 비닐로 싸인 플라스틱 투명 빨대를 꺼내 장무기에게 건네주었다. “불회는 병원에 올 때마다 울어서, 와하하를 사 주는 걸로 달래곤 했거든. 조건반사적으로 샀다. 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장무기는 고개를 들더니, 말없이 그 따뜻한 병을 받아들었다. 미묘한 놀라움과 불안함이 눈 속에서 굴러다녔다. 느닷없이 사람에게 귀염을 받은 상갓집 개처럼.
양소는 남을 위로하는 일에 서툴렀다. 장무기가 난데없는 재난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누군가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로 그를 보살피고 다독여 줘야 하는 상황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양소는 생전 자신을 괴롭히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너를 짐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는 소매 끝에 삐져나온 실오라기를 잡아당기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요 며칠 너도 봐서 알겠지만, 그냥 수저 한 벌 더 놓는 정도야. 너 하나 때문에 구걸을 해야 할 지경도 아니고.”
“내가 딱 정해진 시간에 집에 오지 않잖아. 불회 혼자 있으면 안심이 안 돼. 지금은 네가 같이 있으니까 나도 퍽 마음이 놓이지.” 그는 덧붙였다. “전에는 우리 둘뿐이라 아무래도 쓸쓸했거든. 네가 온 뒤로 집이 좀 훈훈해졌지. 네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아주 좋아. 네가 계속 있고 싶으면 얼마든지 있어도 된단다.”
그는 손을 들어 장무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무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가 발음하는 그 두 글자는 가볍고 얇아서 봄바람에 흩날리는 버들개지 같았다.
장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투명한 포장을 벗기고 빨대를 담녹색 병에 꽂아 넣었다. 주입구의 은박지가 조그만 신음을 내고, 새하얀 피가 빨대를 따라 흘러나왔다.
양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턱을 괴고 참을성 있게 장무기가 우유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침묵의 대치에서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장무기였다. “맛있어요.” 그는 겁먹은 어조로 조그맣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양소는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마치 맑은 연못에 물결이 이는 듯했다. “다행이구나.” 그는 말했다. “다음에 또 사줄게.”
1999년까지 십여 분이 남았을 무렵 그들은 병원을 나섰다. 아마 새해를 맞이하느라 그런지 도시는 드물게도 깨어 있었다. 별처럼 점점이 반짝이는 불빛이 따스한 노란색 바다를 이루었다. 크고 작은 음식점은 모두 영업 중이었고, 등급이 각자 다른 대중탕도 모두 열려 있었다. 오래된 음반점마저 시끌벅적한 열기에 동참해 거리 한구석에서 불을 훤히 밝혔다. 음반점 사장은 초록색 군복 외투를 입고 담배를 문 채 문간에 쪼그리고 앉아 건성으로 스피커를 조정했다. 몇 분 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스피커 소리를 따라 엉터리 곡조를 흥얼거렸다.
마음만 있다면 꿈도 있는 거야
세상에는 아직 진정한 사랑이 있어
성공도 실패도 시원한 인생살이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면 돼
양소는 아무 표정 없이 음반점 앞을 지나쳤다. 검은 밤 아래 그의 눈은 깊은 우물 같았다. 어둑하여 뭔지 모를 서리와 먼지들이 수없이 가라앉고 떠올랐다.
장무기는 전광석화 같은 찰나 양소의 우울함을 읽어냈다. 섬광처럼 스친 부정적 감정은 너무나도 미약해서, 몇 초를 넘기지 못하고 바람을 따라 사라졌다. 양소는 여전히 차분한, 느긋하고 여유로운 양소였다. 장무기의 눈에 엷은 안개가 한 겹 덮였다. 그는 괴로웠다. 양소가 혼자 슬퍼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양소가 무엇을 슬퍼하는지도 몰랐고, 자신의 경솔함이 양소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두려웠다.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양소는 그를 바라보았다. 평화롭고, 담백한 눈빛이었다.
막 꺼내려던 장무기의 말은 날카로운 알람 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손목에 찬 전자시계가 울고 있었다. 풀숲에 숨은 귀뚜라미가 시끄럽게 우는 것처럼.
1999년이었다.
목울대가 불안하게 울렁거렸다. 생각해 두었던 구차하고 어색한 위로의 말은 목구멍 안에서 다 꺾여 버리고, 남은 잔해가 한데 모여 새로운 말로 이어지더니 당당하게 그의 입술에서 뛰쳐나갔다.
그는 말했다. “아저씨, 행복한 새해 보내세요.”
4
1999년은 1998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가난은 그대로 가난이었고 근심은 여전히 근심이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무감각한 쓰라림이 가득했다. 양소는 예외였다. ―안정적으로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일자리는 여전히 구하지 못하긴 했지만― 음력 설까지는 아직 며칠 남았는데도, 그는 일찌감치 설맞이 상태로 돌입해 시도 때도 없이 사탕과 해바라기 씨를 사 들고 돌아왔다. 겨울잠을 자기 앞서 고생스레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는 아빠 다람쥐 같았다.
장무기는 조심스레 양소의 파양금(巴揚琴, 아코디언과 비슷한 러시아 전통 악기 바얀)을 안은 채, 반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왔다. 본래 이 시각이면 집에서 양불회와 함께 숙제를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는 단지 입구에서 양소의 퇴근을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장무기는 이것을 무엇보다도 숭고한 사업으로 삼았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아주 곧고 충성스러운 나무처럼 한 치 흐트러짐 없이 단지 입구에 서 있었다. 금가루 같은, 되직해서 풀어지지 않는 정성이 눈과 마음에 온통 흘러넘쳤다.
양소는 걷다 뛰다 하며 쫓아오는 장무기를 전혀 귀찮아하지 않았다. “무겁지 않니?” 그는 물었다.
장무기는 고개를 젓더니 호기심 어린 투로 물었다. “아저씨, 손풍금 켤 줄 아세요?”
양소가 대답하기도 전에 둘은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복도는 여전히 새카맸다. 장무기는 일부러 양소와 위치를 바꾸어, 한발 먼저 깊은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양소는 장무기의 뒤를 따랐다. 어둡고 기다란 복도에서 하얀 패딩을 입은 장무기는 한 줄기 빛처럼 보였다. 그는 이제 더러운 계단 난간을 움켜쥘 필요도 없었고, 먼지가 가득 덮인 벽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장무기가 언제나 앞에, 계단 한 칸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무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기울여 긴장한 채로 양소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파양금을 단단히 껴안고, 다른 한 손은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늘어뜨렸다. 그 손과 손의 주인은 언제든 양소의 지주이자 기댈 곳이 되어 줄 태세였다.
“아저씨, 조심하세요.”
“응.” 양소는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 저도 모르는 사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날 밤 장무기는 자연스레 답을 알게 되었다. 일과를 마친 세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일을 하려 했을 뿐 서로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약속이나 한 듯 다 같이 거실에 모이게 되었다. 장무기는 그림을 그렸다. 희뿌연 물속의 연꽃, 나무 그림자에 비스듬히 걸린 달, 우뚝 솟은 옥 계단 위에 한 움큼 쌓인 눈을 그렸다. 양불회는 아무렇게나 소파에 누워 하드커버 소설을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양소는 소파 구석에 단정히 앉았다. 파양금 위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짧은 음표가 몇 번 지나가더니 구성지고 부드러운 곡조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허공을 심해처럼 가득 채우며 장무기의 귓가로 끊임없이 쏟아졌다. 장무기는 붓을 쥔 채 숨도 쉬지 못하고 들었다. 광활하고 황량한 설원에 와 있는 듯했다. 머리 위에는 해를 가리는 구름이 가득했고 귓가에서 매섭게 싸늘한 바람이 길게 울었다. 한겨울의 선물로 가슴이 꽉 찼다. 얼음 같은 차가움에 호흡마저 무거워졌다. 마음에서 깨어난 고독이 느리고도 사납게 그의 폐부를 물어뜯었다. 혀끝, 식도, 가슴까지 쇠 비린내 같은 맛이 감돌았다. 아무 상처도 없는 가슴에서 선혈이 솟구쳐 셔츠에 검붉은 꽃을 피워냈다. 꽃송이의 붉은색은 금세 흐려져 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느낌뿐이었다. 피인가? 그는 손끝의 붉은색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빠, 이거 뭐라고 읽어요?”
음악이 갑작스레 멈췄다. 장무기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옷 너머로 얇은 근육 아래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왜 이러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혼란을 느꼈다.
양소는 연주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파양금을 나무 상자에 넣고 잠근 뒤, 상자를 소파와 벽 사이 틈에 넣어 두었다. 그는 장무기가 줄곧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의 시선은 직설적이고 뜨거워서, 대기권을 거치지 않고 직사로 내리쬐는 햇빛 같았다― 그는 자연스레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래?”
장무기는 나쁜 짓을 저지르다 현장에서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찔렸다. “아뇨, 아무것도요.” 그는 당황해서 몇 번이나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양소가 물었다.
장무기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양소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아저씨는 정식으로 악기를 배우셨어요?”
“아니, 전혀.” 양소는 간단히 답했다.
“오빠, 있잖아.” 양불회가 갑자기 끼어들더니 생글생글 웃었다. “아빠가 대학 다닐 때 뭐 전공했을 것 같아?”
“문학이나 예술?” 장무기는 소파에 앉은 양불회를 보며 자신 없이 넘겨짚었다.
“틀렸어.” 양불회는 딱 잘라 부정했다. “다시 맞혀 봐.”
“역사? 언어? 법학? 언론?” 장무기는 자기가 아는 문과 전공을 있는 대로 대 보았다.
양불회는 더 크게 웃었다. “틀렸어, 다 틀렸어.” 그가 말했다. “그냥 가르쳐 줄까?”
“응, 가르쳐 줘.” 장무기는 얼른 말했다. 눈에 기대가 가득했다.
“기계 설계와 제조 및 자동화.” 옆에 있던 양소가 정확한 답을 발표했다. “내 전공.” 그는 덧붙였다.
양불회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빠,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그는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친딸 맞아? 이런 재미까지 빼앗아 가는 법이 어딨어요?”
“아빠의 전공을 갖고 수수께끼 놀이를 하면 쓰겠니.” 양소는 얼굴을 굳히더니 검지로 양불회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네가 잘못했지. 얌전히 있어.”
양불회는 씩씩거리더니 과장된 동작으로 슬리퍼를 끌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오향 해바라기 씨 사 왔는데, 안 먹을래?” 양소가 물었다.
양불회는 얼굴을 굳히려 노력했으나 눈가에는 이미 웃음기가 드러난 뒤였다. “먹을래!”
해바라기 씨를 까먹다 보면 수다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장무기도 해바라기 씨 봉지를 쥐었지만 먹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양불회는 그가 딴생각에 빠진 것을 보고 손을 눈앞에서 흔들어 대며 다정하게 물었다. “오빠, 왜 그래? 아직도 기계 설계와 제조 및 자동화 생각 중이야?”
“어? 어, 응.” 장무기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겸연쩍게 얼굴을 붉혔다. “아저씨가 연주를 하도 잘하셔서 음악가 같았어.”
“아빠가 공장 다닐 때는 공장의 문화예술을 책임지는 기둥이었지. 다들 그렇게 불렀다고.” 양불회는 조금 자랑스러워하는 투였다. “하지만 아빠는 기계 자동화 전공 맞아. 진짜야. 거짓말이면 내가 개다.”
“아저씨, 손풍금은 어렸을 때부터 배우신 거예요?” 장무기는 양소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있겠니.” 양소가 웃었다. “어릴 때는 배부르게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손풍금이 있어 봤자 당기지도 못했을걸.”
“그럼…….”
“됐다, 괜히 스무고개 할 것 없어.” 양소는 해바라기 씨를 비닐봉지에 다시 쓸어 담고 제 컵에 물을 따랐다. “대학을 소련에서 다녔거든. 여가시간에 친구들이랑 밴드를 했었지. 악기나 노래나 다 그때 배운 거야. 그냥 취미로 한 거였는데 밥벌이가 될 줄은 몰랐구나.” 그는 물컵을 들었다. 뜨거운 김이 눈 속에 자욱했다.
“그럼 지금은 예술 쪽 일을 하세요?” 장무기가 물었다.
“그런 걸로 세 사람 밥벌이가 되겠니.” 양소는 아연해 실소했다가, 곧장 정색하며 말했다. “원래는 하얼빈 광명철강 제1공장 기사였지.”
“전에는?” 장무기가 물었다. “그럼 그 뒤에는요?”
“그 뒤에는,” 양소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퇴직했어.”
당시 장무기는 퇴직 두 글자의 파괴력과 무게를 잘 몰랐다. 그는 양소의 평정에 속았다. 퇴직이 그저 누런 잎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처럼 가볍고 별 것 아닌 일인 줄 알았다. 양소가 언제든 다시 취직할 희망을 품고 있는 줄로 여겼다. 그는 조금 순진하게 웃으며 의심 없이 말했다. “아저씨, 다 괜찮아질 거예요.”
5
춘절연환만회(春節聯歡晩會, 중국 국영방송에서 진행하는 설 특집 생방송 프로그램 춘만) 방송이 시작되기 전, 양소는 부엌에서 설날 먹을 만두를 빚으려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었다. 장무기도 부엌에 있었다. 그는 작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부추를 다듬었다. 원래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어도 되지만 굳이 와서 돕겠다고 했다. 양소야 당연히 좋았다.
“돼지고기랑 부추가 들어가요?” 손을 잠시 멈추고 장무기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넣으면 되지. 부추랑 달걀도 괜찮아.” 양소가 물었다. “무슨 소가 좋아?”
“저도 잘 몰라요.” 장무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돼지고기랑 파 들어간 것만 먹어 봤어요.”
“부모님 두 분 다 공무원 아니었어? 잘 사는 집에서도 그렇게 근검절약을 해?” 양소는 놀리는 투로 웃었다. “전복이나 상어 지느러미라도 넣지.”
“만두를 빚은 적이 없어서요. 외할아버지랑 외삼촌이 보내 주셨던 거예요.” 장무기가 설명했다. “보통 부모님은 설 때 집에 안 계세요. 현장 위문이나 양로원, 보육원 같은 곳에 다니시느라고요. 항상 저 혼자 보냈어요.”
그의 우울함이 환히 보였다. 손에 밀가루가 잔뜩 묻어 있지 않았다면 양소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래, 부모님은 위문 다니신다고.”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혼자 집 지키는 아이는 내가 예뻐해 주면 되겠네.”
장무기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양소를 바라보더니 소리 없이 웃었다.
고기도 다 손질해 놓았고, 채소도 다 씻어 다듬었다. 양소는 잠시 쉴 겸 장무기, 양불회와 함께 춘만을 보았다. 밑천이 제일 덜 드는 시간 때우기이자 오락거리였다. 화려하고 웅장한 공개홀에서, 모든 사람이 산뜻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다. 하나같이 아주 정밀한 계산을 거친 것처럼 딱 적당한 정도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자랑스러우면서도 또 겸손한 태도로 태평성세의 풍경을 찬양하며 노래했다. 양소도 따라 웃었다. 공연히 입가에만 걸리는 웃음이었다.
“이것까지만 보고 만두 빚으러 가야겠다.” 양소가 말했다. 타다닥 터져 나가는 폭죽 소리에 목소리가 삼켜졌다. 그는 양불회더러 텔레비전 음량을 높이도록 시켰다.
코너 이름을 본 순간 양소는 희미하게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같은 하얼빈 출신의 국가 일급 배우가 가방을 등에 메고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친근하게 생긴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구슬 꿴 듯 유려한 말로 자신의 고상한 각오를 읊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나라 생각을 해야지. 나 아니면 누가 물러나겠어!”
공개홀에 오래도록 끊길 줄 모르는 박수 소리가 울렸다. 현장의 관객 모두가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열렬하게 손뼉을 쳤다.
“수레바퀴가 앞으로 구르듯, 사람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바로 그거야. 처음부터 다시 가자고!”
“보고 있어. 난 만두 빚어야겠다.” 양소는 일어서서 별 재미 없다는 듯이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 들어선 순간 얼굴의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담배는 끊은 지 오래라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찬장에 기대어, 있지도 않은 허공의 점을 응시하며 멍하니 있었다. 공기가 부엌 유리창에 물방울로 엉겼다가 혜성이 추락하듯 떨어지며 길고 삐뚤빼뚤한 흔적을 남겼다.
“아저씨, 지금 만두 빚으시려고요?” 장무기가 부엌문을 열었다. “저도 같이 할게요.”
“응, 해야지.” 양소는 그렇게 답하면서 얼른 웃었다. “네가 오니까 양불회는 아주 해방이구나.”
“불회도 같이 하겠다는 걸 제가 말렸어요.” 장무기는 스웨터 소매를 걷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한 번도 만두 빚은 적이 없어서 배워 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제야 보내주더라고요.”
양소는 만두피를 어떻게 만드는지 차근차근 가르쳤다. 장무기는 금방 배웠다. 두 번의 작은 실패를 겪더니 퍽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 다만 좀 손이 느렸다. 양소는 만두소를 뜬 숟가락을 쥔 채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그는 장무기가 작은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납작하게 누르고, 잡아당기고, 결국은 투명한 종이처럼 얇게 만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모호한 분노가 솟았다. 가장 혼란했던 시절 싹텄던 분노가 지난 일을 가슴속에 한데 모아 두었다가 이제 폭발까지 마지막 일 초만 남겨둔 듯했다.
“아저씨?” 장무기가 조그맣게 그를 불렀다. 아직 맑은 소년티가 다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다. 말마디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봄날의 버들개지가 작은 동물의 촉촉한 코끝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디 편찮으세요?”
양소는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웃으면서, 온화한 표정을 지은 채 떨쳐내듯 말했다. “무기,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양소는 정말 이야기에 재주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에는 기복이나 변화도 없었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도 없었다. 아예 일반적인 기승전결조차 없었다. 순조롭게 이야기가 이어질지는 순전히 유일한 경청자의 성원에 달려 있었다.
그는 가졌던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이 한때 하얼빈 광명철강 제1공장 기사였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공장에는 자체 탁아소와 기술학교가 있었고, 공장 신문과 방송이 있었고, 공장 병원과 경비실이 있었다. 거의 고도의 자치화를 이룩한 소규모 사회였다. 그의 딸은 공장 단지의 교육 제도대로 학교에 다녔다. 탁아소에서 소학교, 소학교에서 중학교까지 한 푼도 돈이 들지 않았다.
그는 그의 공장이 하얼빈 시에서 가장 높은 가족 기숙사를 지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족 기숙사는 삼십 층이나 되었고 엘리베이터가 두 대 있었다. 공장 노동자 중 자격이 되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았다. 이십 층은 정말 높았다. 꼭대기 층의 베란다에 서서 위를 올려다볼 때면 손만 들어도 파란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발치의 사람들은 개미 떼 같았다. 관공서 건물마저 조금 규모 있는 개미집에 불과했다.
그는 한때 모두가 말하던 ‘8대 군공(軍工,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경영하는 공장)’과 ‘3대 동력(1950년대 이래 공업이 발달했던 하얼빈의 3대 중공업 공장)’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하얼빈은 조국의 동북부에 똬리 튼 거대한 괴물이었고 철강과 기계가 그것의 뼈와 피이자 살과 가죽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톱니가 맞물리는 금속 소리가 났지만 모든 노동자가 그 소리에서 안정감을 얻었다.
“철강 공장에서 일할 때는 이 사회가 강철로 지어졌다고 생각하곤 했었지.” 이야기를 하면서 양소는 계속 만두를 빚었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만두피 가장자리에 깔끔한 주름이 잡혔다. “사실 그 모든 게 불씨 하나면 깡그리 없어질 종잇장이나 다를 게 없었는데.”
그는 잃은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실업 이야기를 해 주었다. 퇴직의 물결이 밀려왔을 때 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현상 유지, 혹은 ‘명예퇴직.’ 그때 딸은 이제 막 공장 밖의 중점 고등학교(시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학교)에 합격했다. 돈이 필요했으므로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는 유학하고 귀국한 뒤로 쭉 공장에서 일했다. 근속 기간대로 계산하면 대략 4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돈은 결국 그에게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 돈의 행방은 모른다. 옛 취미를 밥벌이 삼아 품팔이 밴드 일을 했고, 가끔은 러시아어도 가르쳐 가며 간신히 딸의 뒷바라지를 했다. 깊은 밤에 행방불명된 돈의 꿈을 꿀 때면 그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런 돈은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는 것처럼.
그는 그의 공장 이야기를 해 주었다. 소수의 동료는 명예퇴직을 선택했고 마찬가지로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다른 도리가 없어 길거리에 좌판을 벌이고 하찮은 싸구려들, 팔릴 리 없는 낡은 물건을 내놓았다. 엉망이 된 꼴을 어떻게든 수습해서 남들더러 이리저리 뒤적이고 곱씹어 보라는 것처럼. 공장에 남은 동료들이라고 딱히 더 나을 것도 없었다. 수당과 복지 제도는 모두 끊겼다. 나중에는 기숙사 엘리베이터마저 멈췄다. 동료들은 곤혹스럽고 힘들게 계단을 오르며 언젠가 공장이 옛 영광을 되찾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그들이 청춘과 땀을 바친 공장은 일련의 복잡한 개혁을 거쳐 국영기업에서 민간 자산이 되었다가 결국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어떤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그의 동북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동북은 퇴직의 물결 때문에 까맣게 타들어 가 하늘을 가릴 듯한 분노로 가득 찼다. 이 분노에는 아무런 목적도 한계도 없었다. 누군가는 할머니의 금붙이를 강도질하고 길을 지나가던 소녀를 강간했다. 어떤 사람은 종일 집에 앉아 싸구려 술을 마셨고 술기운이 오르면 약한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때렸다. 그들은 제 억울함과 원한을 자신보다 더 무력한 사람에게 푸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쓸모없는 짐덩이 취급할 수 있는 약자를 향해 아주 당당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시대와 대중은 언제나 새롭게 빛나는 것들을 향해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살아남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말없이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미 너무 많이 잃어버렸고, 사람들에게 잊히는 길을 걷게 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끝이야.” 양소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기까지 했다. “엄청 재미없지?”
장무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휘청이며 무너질 듯한 새하얀 석회 벽을 바라보는 것처럼.
“다 됐으니 나가서 기다려라.” 양소는 가스 밸브를 돌렸다. 오래된 가스레인지에서 푸르스름한 불꽃이 솟았다. “다 익으면 부를 테니까.”
장무기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그의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의 부끄러워하거나 수줍어하던 웃음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양소는 만두가 냄비에 달라붙어 터지지 않도록 국자로 휘저었다. 한참 그렇게 젓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가벼이 한숨을 쉬었다.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새해구나.”
창밖에서 끊이지 않는 폭죽 소리가 울리고 어두컴컴한 하늘로 가느다란 빛이 무수히 터져 나갔다. 양소는 처음으로 또렷하고 실감 나게 의식했다. 새해다. 낡은 것은 모두 잊히고, 흩어지고, 묻힐 것이다. 설령 세상이 돌연히 무너진다 해도 고막을 터뜨릴 것처럼 울리는 새해의 폭죽 앞에서는 그저 희미한 탄식에 불과하리라.
어째서인지 또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자신에게 낮게 속삭였다. “행복한 새해 보내길.”
6
1999년 4월, 양소는 상해로 떠나는 장무기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하얼빈 태평국제공항으로 가는 길 내내 장무기는 아무 말이 없었다. 1999년 섣달 그믐 이후 장무기는 줄곧 우울하게 가라앉아 근심이 가득했다. 양소가 슬그머니 떠볼 때마다 장무기는 아무렇게나 얼버무렸고, 양소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 역시 십 대 시절을 지났다. 그 나이대에는 비밀이 많다는 것, 입에 담을 수 없는 괴로움과 걱정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묻는 대신, 소홀하기 쉬운 자질구레한 일들에 관심을 보였다.
“여권이랑 비자는 챙겼지?”
“네.”
“신분증은?”
“가져왔어요.”
“표를 집에 두고 온 건 아니지? 비행기 표는 재발급이 안 되는 것 같던데.”
“아니에요. 여기 있어요.”
비행기 표가 없는 사람은 공항 대합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쌀쌀한 봄바람 속에서 마지막 이별을 했다. 양소는 자신이 나이를 먹었나 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헤어지는 것이 퍽 슬펐다. 그는 장무기의 손을 당겨 잡고, 주머니에서 노란 고무줄로 묶은 지폐 다발을 꺼내 쥐여 주었다.
“네 외삼촌이 너무 갑자기 알려주는 바람에, 뭘 챙겨줄 틈이 없더구나.”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좋은 걸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천 오백 원인데, 갖고 있다가 급할 때 쓰렴.”
장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죽어도 그 돈을 받지 않으려 했다.
“가져가, 무기.” 양소가 말했다. “먼 곳으로 가는데, 몸조심하고.”
장무기의 움직임은 이제 그렇게 격렬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죄송해요, 아저씨.” 그는 목이 메어서는, 조금 쉰 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너는 왜 늘 사과만 하니.” 양소는 위로하듯 그의 등을 두드렸다. “네가 나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장무기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불어난 바다처럼 그의 젊은 뺨을 타고 시원스레 흘러내렸다. 그는 팔을 들더니 소매로 거칠게 얼굴을 닦았다. 눈물은 또다시 그의 가슴께로 흘러 떨어졌다. 속눈썹이 여전히 물기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제가 아저씨 돈을 다 써버렸어요.”
양소는 숨도 멈추고 집중해서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그걸―”
“아저씨, 그런 게 아니에요.” 장무기는 코를 훌쩍이면서 집요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아저씨만이 아니에요. 아저씨 친구들의 퇴직금, 동료분들이 받아야 했을 복지랑 수당, 다 제가 쓴 거예요―”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목소리는 봄바람을 맞아 떨리는 나뭇가지 같았다. “엄마가 저를 외국으로 보내려고 자기 직위를 이용해서 970만을 횡령했대요. 거기서 300만이 퇴직금이었어요. 외할아버지가 사방으로 찾아다녔는데도 소용없어서 결국 엄마는 갇혔어요. 그래서 저라도 먼저 가라고…….”
양소의 웃음이 굳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망연하고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생명력을 다 잃고 도마 위에서 썰리고 다져지기를 기다리는 고깃덩이 같았다.
“죄송해요, 아저씨.” 장무기의 눈에서 또 폭우가 쏟아졌다. 그는 온몸을 떨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네 잘못이 아니야.” 양소는 말했다. 그는 적절한, 품위 있는 웃음을 보여주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럴 힘이 없어서 입술은 꼭 다물려 얇은 선을 그렸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비행기가 낮게 내리깔린 하늘을 가로지를 때, 양소는 눈물을 닦으며 탑승구로 향하던 장무기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는 보안 검사를 받으면서 양손을 들어 올렸다. 당당하게 삶을 향해 투항하는 것처럼. 장무기는 아직 젊었다. 언제든 당당하게 삶을 향해 백기를 들어 올릴 권리가 있었다.
양소는 그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아무 까닭도 없이 두 번이나 살해당한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는 은소소였다. 그의 손에 쥐어진 권력은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싸늘했다. 두 번째는 장무기였다. 그의 흉기는 부드러웠고, 뜨거웠고, 찬란히 빛났다. 양소는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분노나 원한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가슴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아무것도 잃은 게 없는 것 같기도 했고, 그의 전부를 찰나에 잃은 것 같기도 했다.
에필로그
2000년 여름, 양소는 북경대를 다니는 양불회와 함께 남쪽으로 여행을 갔다. 여행은 부녀의 오랜 소원이었지만 남쪽에 가게 된 것은 즉흥적 발상이었다. 나서기 전 양불회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아빠, 여행을 꼭 갈 필요는 없지 않아요? 별 재미도 없고.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좋은데. 안 그래요?”
양소는 딸의 침착한 얼굴 아래 조마조마한 불안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짧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양불회는 시간과 돈을 아끼려고 줄곧 머리를 기르지 않아서, 지금도 보송보송한 동물 같았다― “걱정하지 마. 아빠 돈 있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양소는 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살짝 헛기침을 했다. “이제 어디 가고 싶으면 아빠가 같이 가 줄게.”
“언제 돈을 벌었대? 나한테는 아무 말 없었잖아요. 내가 남도 아니고.” 양불회는 웃더니 금세 시무룩해졌다. “오빠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셋이 같이 가면 좋았을걸.”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아버지를 바라보며 한참 주저한 끝에 조심스레 물었다. “아빠, 만일 오빠가 돌아오면…… 오빠를 미워하지 않으면 안 돼요?”
“내가 언제 그 애를 미워했어?” 양소는 영문을 몰랐다. “내가 왜 미워해?”
“작년에 오빠가 떠나기 전에 그랬어요. 아빠가 자기를 죽도록 미워할 거라고.” 양불회가 말했다. “울면서 나더러 계속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자기가 한 말은 다 지킬 거라고, 빚진 것도 다 갚을 거라고. 작년에 같이 여행 가자는 얘기도 했었는데 없으니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멀쩡한 사람더러 자꾸 없다, 없다 하면 어쩌니.” 양소는 아연해서 실소했다. “당연히 안 미워하지. 뭐하러 미워해.”
“정말 안 미워해요?” 양불회는 재차 확인했다.
“미워했으면 좋겠나 보다?” 양소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정말 안 미워해. 미워해 봐야 뭐하니.”
양불회는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소가죽 봉투를 들고 나왔다. 그는 정중하게 그것을 양소의 손에 놓고는, 아버지가 봉투를 여는 것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전해 주신 등기우편이에요.” 그가 말했다. “사흘 정도 갖고 있었어요.”
봉투에 든 것은 얇은 어음 한 장뿐이었다. 힐끗 보니 액수는 8만이었다. 그는 무관심하게 봉투를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십여 번을 살폈다. 어음 말고는 봉투 안팎으로 글자 한 자 없었다. 봉투의 주소 칸도, 이름 칸도 비어 있었다. 양소는 알고 싶었던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는 다시 어음을 봉투에 넣고 양불회에게 건넸다. “너한테 온 거니까 네가 갖고 있으렴.” 그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짐 챙기자. 가야지.”
남쪽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좋았다. 부드럽고 수려한 물길 위로 분홍색과 흰색 연꽃이 가득했다. 연꽃은 빽빽하게 한데 모여 자라나서, 시문에서 묘사하는 고결함과 우아함 같은 것은 한 톨도 없었다. 양불회는 과감하고 낯가림도 없고 말주변도 좋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연 따는 아가씨에게 연밥을 좀 달라고 했다. 양소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돈을 줘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젊은 아가씨는 굳이 사양하고는 통 크게도 아예 연꽃을 한 송이 따서 양불회에게 선물로 주었다.
양불회는 연밥을 몇 알 먹더니 쓴맛이 나자 남은 것은 양소에게 쥐여 주었다. 연꽃은 몹시 마음에 들었으므로 양소가 건드리지도 못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초록색 완행열차에서, 놀다 지친 양불회는 양소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손에는 아직도 연꽃을 꼭 쥐고 있었다. 양소는 꽃을 바라보았다. 우뚝 솟은 옥 계단에 한 움큼 쌓인 눈, 나무 그림자에 비스듬히 걸린 달, 희뿌연 물속의 연꽃이 난데없이 떠올랐다. 여전히 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는 연밥이 옷을 뚫고 심장에 뿌리를 내린 것 같았다. 연한 줄기 아래로 연꽃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밤바람이 불어올 때면 연잎이 솨아 소리를 냈다. 연꽃잎 하나가 밤바람에 날려 높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디로 떨어졌는지,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양소는 눈을 감았다. 그는 깊은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