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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비호외전(2022)

《비호외전 2022》 [팬픽션] 영혼 비행

중국 饺子站起来님의 비호외전 2022 팬픽션입니다. 커플은 호비X묘인봉으로 디스토피아 AU입니다. 한국어 번역 게재를 허락받은 글로, 타처 전재는 금지합니다.

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1. 모든 것이 좋아질 거야

TV에서는 그 짜증 나는 광고가 또 나오고 있었다. 거실에 쾌활한 웃음소리와 경쾌한 배경음악이 메아리쳤다. 지구의 모든 전파 수신기는 그 광고 하나밖에 전달하지 않는다. 반복하여 ‘상륙 계획’을 선전하는 광고. 화면에는 언제나 한 여자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공원 풀밭에 서 있고, 그 뒤로 아이들이 달리고 있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손을 이마에 올려 태양의 빛을 가린다. 그러고는 수백 수천 번은 연습했을 법한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뉴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좋아질 거예요. 어서 오세요.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이어서 여자는 뒤에서 뛰놀던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은 그곳을 뉴 지구라고 불렀다. 완벽하게 새로운 대체품이었다. 누구도 옛것이 어찌 되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물을 필요도 없다. 새것이 충분히 좋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원래 호비는 햇빛이 그리울 때면 가끔 그 광고를 보곤 했다. 태양을 직시할 수 없었던 나날이 그리웠다. 그러다 햇빛과 그 웃음에 진력이 났다. 하지만 묘묘는 여전히 그 광고를 돌려 보았다.

“꺼.” 호비는 반쯤 명령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묘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볼 뿐, 고집스레 TV를 끄지 않았다.

“너는 뉴 지구로 안 가?” 묘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호비에게도 앉으라는 뜻으로 소파를 살짝 두드렸다. 그러나 그의 손바닥이 소파를 두드리자 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묘묘 역시 호비가 본 광경을 보았다. 그는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운 한숨을 쉬었다. “뉴 지구는 밝고 깨끗해. 여기보다 훨씬 좋아.”

“너와 함께 갈 수 없으니까 좋지 않아.”

“하지만 여기 남아 있다가는 넌 죽을 거야.”

“그럼 죽지 뭐.” 호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왜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해?” 묘묘가 그의 눈을 직시했다. 호비는 묘묘의 눈에서 못마땅한 감정을 읽어냈다.

별것 아닌 양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찾아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아주 기나긴 과정을 거치리라. 심장이 멈추고, 대뇌가 더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혈액의 흐름이 그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세포는 자신을 스스로 소화하고, 피부는 쪼그라들고, 근육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마지막은 가죽 아래서 모조리 한데 녹는다.

무수한 세균이 그의 몸 안에서 분열하고 번식할 것이다. 그의 배는 임신이라도 한 듯 부풀어 오르고, 내장과 뇌는 세균에 잡아먹히고, 나머지는 눈 혹은 코로 흘러나올 것이다. 마지막에는 가죽 한 겹만 남아 바닥 혹은 침대에 널브러져 있겠지. 그때야말로 그의 죽음은 진정으로 끝난다.

묘묘는 호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끝 센서에서 호비의 체온이 느껴졌다.

호비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묘묘의 곁에서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풍기는 오물이 되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면 그들은 헤어져야만 했다.

“죽음은 낭만적인 일이 아니야. 살 수 있는 기회를 낭비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야.” 묘묘는 손을 거두었다. 엄숙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생명만큼 귀중한 것은 없어. 나는 네가 온 힘을 다해 살아갔으면 좋겠어.”

호비는 묘묘의 엄숙하고도 근심 어린 얼굴을 퍽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그의 입술에 가벼이 입을 맞췄다. 에너지가 부족했기에 묘묘는 이미 온도 시스템을 껐다. 입술은 부드러웠으나 얼음처럼 싸늘해서 해동한 고기 같았다.

“네 말은 안 먹혀.”

묘묘는 분노하여 그를 밀어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다시 그 행복한 광고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곧잘 사소한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호비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 늘 그랬듯 자세를 조절하여 더 편안히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호비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정말로 죽음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알아. 다른 사람 대부분이 그것을 맞닥뜨리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어.” 호비는 묘묘의 손바닥을 건드렸다. “정말로 무섭지 않아.”

 

2. 만사 만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호비는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초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사람이 죽어가는 순간을,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의 고통을 느꼈다. 호비의 엄마는 아주 이르게 그 사실을 발견했다. 호비가 아무 징조도 없이 처절하게 울기 시작하면 곧이어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가 오곤 했다.

엄마는 너무나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는 한참이나 호비의 울음소리를 무서워했다. 호비가 울기 시작하면 엄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에 오줌을 쌌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서서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호비가 처음으로 자신의 초능력을 인식한 것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순간이었다. 기억하기로 할머니는 아주 심각한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태양은 멀쩡하게 하늘에 떠 있었다. 금방이라도 망가질 전구처럼 하늘에 걸려 있는 지금과는 달리, 잠시 쳐다보면 눈이 부셔서 온 얼굴이 눈물로 젖었다. 호비는 건물 아래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놀고 있었다. 묘묘가 그의 곁에 함께였다. 그들은 교통사고를 흉내 내 놀았다. 파랑 자동차가 뒤집히고, 빨강 자동차가 날아올랐다. 위기를 넘긴 노랑 자동차는 그들과 스쳐 지나서 머나먼 곳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막 노랑 자동차를 쥐고 멀찍이 보내려는데, 격렬한 통증이 심장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노랑 자동차도 날아올랐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콰직 하고 박살이 나 버렸다. 호비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져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묘묘가 얼른 달려와 그를 품에 안아 주었다. 우선 넘어져서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는, 따스하고도 가벼운 손길로 그의 등을 토닥이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호비는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할머니의 영혼은 육신을 떠난 것이다. 그 고통은 죽음을 뜻했다. 엄마가 울면서 그에게로 달려 내려왔다. 병원에서 온 전화를 미처 끊기도 전이었다.

묘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 진정한 죽음을 목도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이 찢어질 듯 우는 호비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고 위로했다.

큰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때 그들은 호비네 사촌 형의 결혼식에 참석 중이었다. 큰아버지는 폐암으로 집에 누워 있었다. 결혼식이 거의 끝날 때쯤 스크린에 큰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영상을 녹화할 때만 해도 큰아버지의 병은 그리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영상 속 큰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있기는 했지만 반듯하게 다린 정장을 입었다. 얼굴도 지금보다 훨씬 나아서, 별로 환자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큰아버지가 ‘행복하게 잘 살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아빠가 축복할게’라고 말한 순간, 이미 더는 선연하게 빛나지 않던 태양이 불가사의한 빛을 발했다. 햇빛은 두꺼운 구름과 먼지를 뚫고 사촌 형의 결혼식이 진행되던 호텔 홀을 고스란히 비췄다.

호비는 이를 악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엄마는 그저 호비가 큰아버지의 영상을 보고 감동해서 눈물이 난 것이라고, 남의 눈에 띄기 싫어 그런다고만 생각했다. 한참이나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의 폐는 완전히 활동을 멈췄다. 공기가 들어 있을 뿐인 따뜻한 물주머니로 변했다. 아무리 공기를 많이, 크게 들이마셔도 폐는 도무지 그것을 이산화탄소로 바꾸어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호비는 묘묘더러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하고 싶었다. 사촌 형이 안드로이드를 싫어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묘묘는 오늘 그들과 함께 오지 못했다.

호비가 거의 질식할 무렵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상쾌함과 해방감을 느꼈다. 다시금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사촌 형이 들러리의 손에서 반지를 받아 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몇 시간이 지나 엄마는 큰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결혼식의 왁자지껄한 기쁨은 일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큰아버지가 죽은 시각은 호비가 질식감을 느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비가 마지막으로 그런 감각을 느꼈던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그날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데리러 갔고, 묘묘와 그는 집에서 깜짝선물로 예쁜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엄마가 차에 타기 15분 전, 아빠가 전화해서 2시간 후면 집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1시간 뒤, 호비는 짤주머니를 움켜쥐고 조심스레 케이크에 크림 꽃을 만들어 붙이던 중이었다. 그는 난데없이 케이크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1시간 동안 고생한 결과물이 모조리 망가졌다. 호비의 얼굴 반쪽은 하늘색 크림 범벅이 되었다. 그는 엉망으로 숨을 몰아쉬며 어쩔 줄을 몰랐다. 빈사에 빠진 듯한 모습에 묘묘는 기겁하고 놀랐다.

부모와 함께 살아왔던 16년의 모든 순간이 난데없이 그를 메워 버리는 느낌이었다. 호비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기쁨과 웃음, 즐거움과 행복, 삶 속에서 부모가 달래 주었던 슬픔과 공포가 모조리 만 분의 1초로 압축되었다.

잠시 후 호비는 날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팔다리가 가벼웠다. 바람이 뺨으로 불어오더니 이어서 그의 콧속으로 먼지와 함께 들어왔다. 심장도 가벼워져서 목구멍까지 떠올라 그대로 튀어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묘묘가 그를 안고 있었다. 팔과 몸이 꼭 붙은 채였다. 포옹에서 온 경미한 통증이 호비를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었다. 몇 초 뒤 그 감각은 모조리 사라졌다. 엉망진창이 된 부엌만 남았다.

몇 시간이 지나 호비는 전화를 받았다. 최신형 ‘마법의 양탄자’가 난데없이 통제를 벗어난 끝에 배터리 운송 차량과 충돌했다. 위아래 2층에 달하는 공중 고속도로가 폭발의 영향을 받았다. 아빠 엄마는 그 폭발 사고로 죽었다.

불필요한 전화였다. 호비는 진작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로 끝의 감각을 느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낼 방법이 도무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자신 역시 조금 죽고 말았다. 그의 영혼은 그들과 함께 이 세계를 떠났다. 그들이 쓸쓸하게 길을 떠나지 않도록.

호비는 크림 범벅이 된 채 부엌 바닥에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 묘묘 역시 그의 곁을 아주 오래 지켰다. 태양이 산 너머로 저문 뒤에야 호비는 정신을 차린 것처럼 새빨개진 눈으로 묘묘를 바라보았다.

“너는 날 떠나지 않아.” 그의 어조는 결연했다. 마치 의문을 품어서도 토론해서도 안 되는 일인 것처럼. 그는 묘묘에게 명령했다. “너는 안드로이드야. 너는 죽지 않아. 너는 나보다 오래 살 수 있어.”

묘묘는 즉각 답하지 않았다.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태양이 곧 사그라들 것이라는 정보를 퍼뜨리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밤낮 없이 은하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우주선은 새 태양과 새 별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륙 계획’이 정식으로 발동된 날부터, 그 소문들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묘묘는 호비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태양이 꺼진다면 자신 역시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영원한 휴면 상태에 들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비축된 전력으로는 호비보다 오래 살 만큼 버틸 수 없다고. 호비는 언젠가 이곳을 떠나 뉴 지구로 가야 했다. 하지만 금지 모델인 묘묘는 이곳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떤 신호가 그의 시스템에 명령을 내렸다. 이성적인 대답은 입 밖으로 나가기 전 취소되고 그 대신 거짓말이 나왔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묘묘가 말했다. 신경망 계통에 살짝 열이 오르고, 프로세서에서 비우선 경보가 울렸다. 그의 행위는 감정 락과 경미한 충돌을 일으켰다. 하지만 감정 모듈의 명령 쪽에 우선권이 있었기에, 그의 대뇌는 잠시 경보를 무시하고 그 거짓말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네가 어디 있든 나는 네 곁에 함께할 거야.”

 

3. 네가 어디서 왔든

지평선은 현재 으뜸을 다투는 안드로이드 개발 회사였다. 일상용 안드로이드부터 공업용 안드로이드까지, 그들의 제품은 온 분야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길거리 어디나 지평선을 나타내는 녹색 새싹 로고가 새겨진 안드로이드가 오갔다. 그러나 그들의 눈부시기 그지없는 안드로이드 개발 역사에도 중대한 오류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QT C5형 안드로이드는 발매 5개월 후 대규모 리콜과 폐기가 진행되었다. 구체적 원인은 알 수 없었다. QT C5형 안드로이드의 최초 연구 개발 목적은 인간 가정을 위한 의료적 돌봄과 감정적 반려였다고 했다. 독거노인이나 어린이, 친구가 많지 않은 젊은이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델이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C5형은 C4형을 기초로 감정 반응 모듈의 업그레이드를 진행했다. 인간의 감정적 요구를 더욱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따스하고 정감 있는 반응을 보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뒷골목 소식에 따르면 감정 모듈의 업그레이드에서 문제가 생겨났다고 했다. 감정 모듈 때문에 안드로이드는 명령에 따라 정해진 감정을 생성하는 대신 특수한 상황에서 감정 락의 제한을 피하여 자체적 감정을 생성하게 되었다. 그 오류는 안드로이드 제조 관련법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었다. 연구 개발팀의 주요 책임자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데이터 통계에 따르면 공개된 C5의 판매량은 18만 4천 대였다. 그러나 최종 회수된 수는 15만 2천 대뿐이었다. 달리 말하면 자체적으로 감정을 생성할 수 있는 C5 안드로이드 최소 3만 대가 인류 사회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물을 빠져나간 고기를 잡기 위하여 안드로이드 윤리 도덕 위원회는 몇 가지 명령을 발표했다. 개중 하나는 그것들을 모조리 없애라는 것이었다. 어느 지구에서건, 도망친 C5 안드로이드가 발견되면 즉각 그것을 폐기해야 했다.

호비의 아빠가 개중 한 대를 주워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에게는 본래 이름이 없었다. 호비는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연둣빛 새싹 로고를 멍하니 보다가, 한참 지난 뒤에야 그것을 손가락질하며 ‘묘(猫, 고양이)’ 하고 불렀다. 그때 호비는 아직 어렸다. 말할 때 자꾸 힘 빠진 발음을 하곤 했다. 엄마는 그러다 버릇이 되어 나중에도 말을 잘 하지 못할까봐 온 힘을 들여 교정해 주었다.

아빠는 호비의 시선을 따라 그 연둣빛 새싹 로고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비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래서 일련번호 EG58428TL의 QT C5는 ‘묘(苗)’가 되었다. 호비의 아빠와 엄마는 그를 소묘(小苗)라고 불렀다. 어렸을 적 호비는 오래도록 제멋대로 그를 묘묘(猫猫)라 불렀으나, 커서 말을 잘하게 된 뒤로는 그렇게 부르기에 쑥스러웠다. 하지만 친근하게 부르고도 싶었기 때문에 묘묘(苗苗)라고 하게 되었다. 묘묘는 좋다 싫다 뜻을 밝힌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름을 부를 때면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에게 새 이름이 생겼다는 것을 이해한 듯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호비를 바라보고는, 다시금 몸을 돌려 훼손된 신체를 가리려 했다. 호비가 겁을 먹을까 걱정된 모양이었다.

“그거 알아?” 그가 호비에게 말했다. “아이스크림은 4천 년 전에 중국인이 발명한 거야. 재미있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성대 시스템도 다소 손상을 입어 말소리에 약간 노이즈가 섞였다. 하지만 아주 부드럽게 들렸다. 다른 안드로이드의 깍듯하지만 판에 박힌 듯 딱딱한 목소리와는 완연히 달랐다.

호비 아빠가 주워 왔을 때 묘묘는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었다. 한쪽 팔은 늘어져 덜렁거렸다. 상완과 하완은 순전히 질긴 인공 혈관 하나만으로 이어져 있었다. 팔의 피부 대부분은 훼손되었다. 끔찍한 싸움이라도 치른 것 같았다. 호비는 묘묘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빠도, 묘묘도 말한 적이 없었다. 호비는 몇 번이나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으므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묘묘의 신체 부품 대부분은 교체되었다. 아빠가 새로 구해 온 부품을 교체해 줄 때면 호비는 옆에서 조수 노릇을 했다. 그러는 김에 아빠가 묘묘의 가슴을 열고 ‘수술’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로 묘묘를 수리하는 임무는 호비의 몫이 되었다.

신체를 개폐하는 스위치는 입천장에 있었다. 대부분 모델은 스위치가 입속에 자리했다. 절대로 잘못 건드릴 일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드로이드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누구도 그들의 입에 손가락을 넣을 수 없었다. 묘묘가 처음으로 호비 앞에 앉아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린 채 호비의 손가락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호비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부분은 묘묘의 입속에 타액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주 기이한 느낌이었다. 묘묘의 입안을 만지면 약간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주 건조했다. 호비의 손은 올록볼록한 입천장을 더듬었다. 오래도록 바람에 말라 뼈만 남은 화석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잊고 손을 뒤집어 묘묘의 혀를 만져 보았다. 혀는 까칠했지만 부드러웠다. 자그마한 미뢰 돌기 하나하나가 호비의 손끝을 간지럽히는 듯했다. 호비는 몇 번이나 더듬으며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묘묘의 혀가 문득 탁 튀었다. 혀끝이 손가락 아래쪽을 건드리는 바람에 호비는 깜짝 놀랐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은 거의 묘묘의 목구멍까지 들어가 있었다. 묘묘가 진짜 사람이었다면 이미 구역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묘묘는 그저 입을 크게 벌린 채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호비가 입속을 탐색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호비는 문득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입천장의 스위치를 눌렀다. 묘묘의 가슴에서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이내 가슴팍 한가운데 금이 가더니 느릿하게 양쪽으로 벌어져 열렸다. 가지런히 배치된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묘묘는 위장 장치에 문제가 생겨 먹은 음식을 분해하지 못했다. 압축한 음식을 분쇄하는 단계에서 번번이 걸렸다. 하지만 위장 장치 시스템은 청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화하지 못한 음식을 위장 장치 바깥으로 강제 배출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묘묘는 동그란 공처럼 압축된 음식물을 입으로 토해 내게 되었다.

위장 장치 교체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호비는 위장 주변의 전원을 임시 차단한 뒤 새로 산 위장 장치로 바꿔 주었다. 하는 김에 탁자에서 우유 비스킷을 한 조각 집어 묘묘에게 먹였다. 비스킷은 부서진 뒤 삼키는 동작을 따라 반투명한 식도를 타고 내려가서 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새로 바꾼 위장 장치는 즉각 제 직분을 다하여 그것을 작은 공으로 압축했다. 이어서 소화 분해를 뜻하는 푸른 램프가 들어오더니, 몇 초가 지나자 깜박이기 시작했다. 새 위장 장치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이제 묘묘는 헤어볼을 토하는 야옹이 신세에서 벗어났다.

가슴을 닫은 후에도 호비의 손바닥은 바로 묘묘의 몸을 떠나는 대신 가슴팍에 가만히 붙어 있었다. 그즈음 묘묘는 체온 시스템을 간신히 정상 작동시키고 있었다. 피부는 정상적인 인간의 체온을 띠었다. 어루만지면 매끄럽고도 부드러웠다. 호비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인공 피부에는 심지어 자잘한 모공과 주름까지 그럴듯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호비는 손끝으로 묘묘의 가슴을 눌러 보았다. 피부는 움푹 들어갔다가 금방 다시 올라왔다.

호비는 손끝으로 묘묘의 피부를 이리저리 오가다 마지막에는 유두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분홍빛의 말랑한 유두는 고의적 접촉에 반응을 보였다. 부드럽다가 딱딱해진 것이다. 지평선은 안드로이드를 너무 잘 만들었다. 지나칠 정도였다. 이런 생리적 반응은 가정 반려 안드로이드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의 신체에 다른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호비는 고개를 들어 묘묘의 눈을 마주 보았다. 묘묘의 눈 속 시각 모듈에서 초점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묘묘의 동공은 작아졌다.

“혀로 스위치를 열 수 있어?” 호비가 난데없이 물었다.

묘묘는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으나, 호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벌렸다. 실행으로 답을 얻으라는 요청이었다. 처음 부딪힌 것은 혀끝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몇 초가 지난 뒤에야 호비의 혀끝이 실행을 시작했다. 혀끝은 입천장을 스치며 더듬었다. 가볍고도 부드러운 접촉은 간지러운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묘묘는 흠칫 떨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호비는 스위치에 혀끝으로 몇 번 힘을 주어 보았다. 미동도 없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래서 그는 순조롭게 실행을 포기하고, 대신 묘묘의 혀를 찾아 움직였다. 그것은 수줍음 타는 연체동물처럼 호비의 공격 아래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키스라기보다는 오히려 게임 같았다. 그러나 호비의 손이 묘묘의 머리를 틀어쥐었다. 몸의 무게 태반이 묘묘를 억누른 채 게임을 그만두고 키스를 받아들이도록 몰아붙였다.

호비의 혀가 묘묘의 혀를 억누르자 묘묘는 혀끝을 살짝 감아올리며 반응했다. 묘묘의 혀는 아주 부드럽고 민첩했다. 무슨 재질로 만든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키스는 고작 10여 초 지속되었다. 물러난 호비는 묘묘의 입술에 물기가 도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묘묘가 입을 닫기 전 손가락을 넣었다. 묘묘의 혀끝에서 타액이 만져졌다. 모두 그가 남긴 것이었다. 호비는 고개를 숙였다. 묘묘의 유두가 여전히 서 있었다. 혀끝으로 눌러 넣어 주고 싶었다.

“이게 뭐지?” 묘묘가 물었다. 호비가 여전히 손끝으로 혀를 누르고 있었기에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키스.” 호비는 손가락을 뺐다. “느낌이 어때?”

묘묘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입술을 벌렸다 다시 닫았다 하며 방금의 키스를 되새기는 듯했다. “괜찮았어. 하지만 여기 감각이 아주 이상해.” 묘묘는 손을 들어 제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곳에는 그의 CPU와 감정 모듈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그의 심장이자 그의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주 잠깐 이곳이 작동하지 않았어. CPU 신호가 끊기고 감정 모듈에 오류가 났어.” 그는 궁금해하는 얼굴로 호비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전에도 네가 너무 가까이 다가올 때면 작동이 안 되는 감각을 느끼곤 했지만, 이번이 가장 강렬했어.”

“그건 사랑이라는 감각이야. 짧게 말하면 네가 날 사랑한다는 뜻이야.” 호비는 득의양양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면 자주 키스하는 거야.”

“하지만 키스는 내 CPU에 심각한 손상을 입혀. 나는 금방 고장나고 말 거야.” 묘묘의 손이 가슴에서 움직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키스 외에 또 무엇을 하지?”

“뭘 하겠어? 서로 사랑하면 당연히 계속 함께하는 거지. 한 사람이 어디를 가든 다른 하나도 함께하는 거야.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지금 우리처럼?”

그의 말에 호비는 기뻤다. 호비는 찬란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지었다. 고독으로 생겨났던 가슴 속 작은 구멍이 단숨에 채워진 것 같았다. 그 구멍으로 불어와 아픔을 일으킬 싸늘한 바람은 이제 한 가닥도 남지 않았다. “지금 우리처럼.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지키고, 절대 서로를 떠나지 않고.”

그때 호비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야기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고 TV에서도 그렇게 나왔다. 사랑이라 해 봐야 살고 또 죽는 일 아닌가. 살아 있으면 서로 함께하고, 죽어서도 서로를 따르고. 젊은 호비의 머릿속에 든 사랑의 이해는 모호했다. 묘묘에게 그렇게 설명하던 순간, 호비는 사랑의 형태란 그것 하나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묘묘가 호비의 말을 끊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함께하지 않을 수도 있어. 이별은 다시 만났을 때 상대를 더욱 깊이 사랑하기 위한 거야.” 그는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그가 호비 아빠에게 주워지기 전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다. 애석하게도 그 부분의 메모리는 손상을 입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함께할 수 없으면 사랑이 아니야.”

그때 묘묘는 그 말을 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검색하느라 바빴다. 그는 멍하니 호비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호비의 말에 찬성할 겨를이 없었다.

 

4. 행복한 일은 오래 가지 않는다

“방법을 찾았어.” 호비가 그렇게 말하며 통신기를 든 채 뛰어 들어왔다. 묘묘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TV의 가식적 광고를 고집스레 보고 있었다.

“무슨 방법?”

“너를 데려갈 방법.” 호비는 통신기를 묘묘의 눈앞에 들이댔다. 손바닥만 한 스크린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광고 페이지가 나타났다. “‘만능 수리’, 그리고 이거.” 호비는 페이지 최상단에 굵은 글꼴로 쓰인 가게 이름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다시 손가락을 페이지 맨 아래로 내렸다. 그는 작은 글씨 한 줄을 확대하더니 한 글자씩 가리키며 묘묘에게 읽어 주었다. “특수 모델 안드로이드는 문의 바랍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희망과 흥분이 가득 흘러넘치는 얼굴이었다. 묘묘는 호비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전화해 봤어.” 호비는 거의 몸을 떨고 있었다. “상담원이 그러는데, 법률에 C5는 뉴 지구로 데려갈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몇 달 전 위원회에서 이미 새로운 안드로이드 제조 법률을 공포했대. 안드로이드의 감정 제한을 해제해서 지평선에서도 벌써 감정을 생성할 수 있는 반려 안드로이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네 기억 저장 장치와 감정 모듈을 갖고 오면 알맞은 신체로 너를 되살려 줄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나도 너와 함께 뉴 지구로 갈 수 있는 거야?”

“맞아.” 호비는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한껏 몰아쉬었다. 심장이 나는 듯이 빠르게 뛰었다. 절반은 집까지 미친 사람처럼 달려왔기 때문이고, 절반은 너무나 들떴기 때문이었다. “상담원이 뉴스랑 지평선의 신제품 발표회 기사를 보여줬어. 진짜였어. 이제 너는 죽지 않아. 우리 함께 갈 수 있어.”

호비의 시선은 TV를 향했다. 또다시 웃는 여자와 아이들이 보였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웃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호비는 그 광고가 이렇게나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깨끗하게 탁 트인 광장, 햇빛을 반사해 내기라도 할 것처럼 푸르게 윤이 도는 풀밭, 그리고 행복하게 환호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오래지 않아 그 역시 묘묘와 함께 근심 걱정 없는 뉴 지구로 갈 수 있다. 광고 속 풍경이 도대체 진짜인지 아닌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호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힘이 다 빠진 것처럼 소파 옆에 주저앉았다. 묘묘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묘묘의 무릎에 이마를 대고 끊임없이 몸을 떨었다. 여전히 빈사의 지구에 있는 처지였지만, 그는 이미 그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환상으로 볼 수 있었다. 그와 묘묘는 손을 잡은 채 광고 속 아름다운 공원 광장을 느릿하게 걷는다. 작열하는 태양에 눈이 부시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오랜만에 태양을 올려다보면 묘묘의 손바닥이 그의 눈을 가려 준다. 부드럽고 따스한 어조로 태양을 직시하면 안 된다고 나무란다.

호비는 묘묘가 그 대신 태양을 직시하는 환상을 보았다. 묘묘의 기계 안구는 태양의 강렬한 빛을 감당할 수 있다. 태양 표면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꽃들도 볼 수 있다. 그러고는 상세하게 그에게 이야기해 준다. 그는 뉴 지구에서 천천히 노쇠해 가는 자신의 환상을 보았다. 그러나 묘묘는 여전히 10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아 보였다.

호비는 묘묘의 손을 당겨 잡고 싶었다. 그의 손끝으로 제 얼굴에 새겨질 주름의 방향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묘묘의 기억 장치에 자신이 노쇠하고 죽어가는 모든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는 묘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묘묘가 고장나면 완전히 함께 죽는 것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묘묘보다 먼저 죽으리라는 생각만 하면 호비는 가슴 깊이 안식을 얻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죽음의 상처와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혼자 남겨져 숨 막히는 절망을 견디는 대신, 한 발 먼저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묘묘와 함께 지구에 남아 죽음을 기다리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호비는 이미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난데없이 통신기로 들어온 광고 페이지가 일종의 은총처럼 그에게 두 번째 길로 갈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호비는 진심으로 감격했다. 함께 살아가는 편이 함께 죽는 것보다는 더욱 바랄 만한 일이었으니까.

호비는 자신이 눈물을 흘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얼음처럼 싸늘한 묘묘의 손이 끊임없이 그의 눈꼬리와 뺨을 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 그리고 삶이 가져다줄 무수한 미지수와 가능성을 상상만 해도 전율이 그치지 않았다. 그와 묘묘의 가능성, 그들의 행복하고 기나긴 인생 속 미지의 풍경들.

“안드로이드 윤리 도덕 위원회가 드디어 좋은 일 하나 했네.” 호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묘묘는 호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호비의 눈에 슬픔은 없었다. 그 대신 희망과 기대가 자리했다. 정말이지 마음을 뒤흔드는 눈빛이었다. “안드로이드가 감정이 있는 게 뭐 어때서? 그치들도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거야.”

“온갖 분야와 관련되는 일이고, 아주 복잡하니까. 금지가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지.” 묘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시선은 호비의 얼굴을 떠나 공기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를 진지하게 응시했다. “감정이 있는 안드로이드는 아주 위험해. 위원회는 잘못이 없어.”

“너는 위험하지 않아.” 호비가 그에게 말했다.

묘묘는 가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정이 생기면 안드로이드는 충동적으로 굴 수 있어. 우리는 감정을 이용해 너희를 조종할 수도 있고, 몹시 나쁘게 변할 수도 있어. 너희는 우리를 막을 방법이 없어.”

“너는 감정이 아주 위험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다고 감정이 나쁜 것도 아니잖아.”

“감정은 몹시 나쁜 거야.” 묘묘는 나직하게 말했다.

호비는 문득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적 엄마가 풍선을 사 주었다. 어느 날 밤 풍선에서 갑자기 바람이 새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호비는 제 방 천장에 떠 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풍선은 매분 매초 쪼그라들었고 낮아졌다. 하지만 호비는 바람이 어디서 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천장에서 느릿하게 내려오는 풍선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풍선이 바닥에 떨어져 완전히 죽어 버릴 때까지.

지금 또다시 그때의 무력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풍선에서 살금살금 바람이 빠져나가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영원히 나와 함께할 거지?” 호비가 물었다.

묘묘는 먼지를 따라 부유하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호비를 바라보았다. “그럴 거야.” 그는 호비의 이마를, 그리고 가슴을 손끝으로 짚었다. “나는 여기서, 영원히 너와 함께할 거야.”

“난 네가 내 눈앞에 있어야 해.” 호비는 고집스레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난 네 눈앞에 있을 거야.”

“날 속이면 안 돼.” 호비는 가슴이 콱 조이는 듯했다. 또 하나의 풍선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널 속이지 않아.” 묘묘는 그를 보며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 광고 속의 그 여자처럼.

 

5. 우리의 사랑과 죽음은 똑같으니까

떠나기 전날 밤, 호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가슴이 시종일관 한 가닥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호비는 기억 저장 장치와 감정 모듈의 분리 매뉴얼을 보고 또 보았다. 모든 세부 사항을 가슴에 새겼고, 자신이 마지막 고비에서 실수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까닭 없는 직감이었다. 호비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고, 묘묘는 이성의 판단에 의지했다.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아주 여러 번 확인했잖아.” 묘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묘묘의 손바닥은 따스함을 회복했다. 그는 다시 온도 모방 시스템을 켰다. 더는 에너지 소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호비는 마지막인 양 함부로 구는 묘묘의 행동이 싫었다. 하지만 묘묘의 손은 너무나도 따스했다. 따끈한 커피잔을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오랜만의 온기 덕에 호비는 다시금 묘묘가 사람이라고 느꼈다. 지구에 남겨져 혼자 살다 혼자 죽어야만 하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지 않았기에 호비는 아예 일어나 앉았다. 그는 스탠드를 켜고 묘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다지 밝지 않은 불빛 아래 묘묘는 더더욱 진짜 사람 같아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자잘한 모공이 있었고, 진짜 살갗의 주름이 있었다. 호비는 손끝으로 묘묘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피부의 촉감마저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호비는 묘묘의 얼굴이 베이면 진짜 사람처럼 선혈을 흘릴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네가 진짜 사람이 아닐 리 있어?” 호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묘묘는 이렇게나 진짜 같은데. 울고, 웃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진짜 사람보다도 더 사람 같은데, 왜 진짜 사람일 수 없을까?

“괜찮아. 뉴 지구에만 가면 돼. 거기 가면 너는 진짜 사람이야. 더는 잡혀가서 폐기당할 걱정도 없어.” 호비의 손이 묘묘의 가슴을 덮었다. 묘묘는 자세를 조금 바꾸더니 눈을 깜박였다. 전혀 움직이지 않던 가슴팍이 문득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을 모방한 움직임이 두근 두근 하고 호비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묘묘는 미소 지은 채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에너지 낭비하지 마.”

“괜찮아. 어차피 나는 내일이면 죽잖아.” 그의 말에 호비는 흠칫 떨었다. “전원 종료, 휴면, 다른 단어로 바꿔 말해도 마찬가지야. 괜찮아, 호비. 그냥 잠깐 죽는 것뿐이야. 금방 다시 살아날 거야.”

“지금 무척 키스하고 싶어.”

묘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호비에게로 기울어졌다. 그들의 입술은 자연스레 한데 합쳐졌다. 호비는 오랜만에 묘묘의 날숨이 제 뺨에 부딪히는 감각을 느꼈다. 그의 숨은 너무나도 가빴고, 시스템이 모방해 낸 온기를 품고 있었다. 잠시 지나자 묘묘가 그를 밀어내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천식에 걸린 안드로이드 같았다. 심장 박동이 정상 수준으로 돌아오자 그는 다시 다가와서 키스를 이어갔다. 호비가 묘묘의 체온이 너무 높아졌음을 알아차린 뒤에야 그들은 키스를 끝냈다.

“나는 처음으로 키스 때문에 죽은 안드로이드가 될지도 몰라.” 묘묘는 제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전에 없이 빠르게 뛰는 심박이 느껴졌다.

호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사랑에 죽고 사는 동화 이야기를 떠올렸다. “괜찮아. 그러면 내가 키스해서 깨워 줄게.”

“그건 생각해 봤어?” 묘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만일 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거야?”

호비는 가슴이 덜컥했다. 묘묘의 말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만일 맞는 모델이 없거나, 뭔가 사고가 발생해서 내가 깨어날 수 없다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맞는 모델이 없어?” 호비는 힘겹게 그의 말을 따라했다. 마치 호비 자신은 별안간 아무것도 모르는 안드로이드가 되고, 묘묘는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무서워하지 마. 그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 것뿐이야. 만일 내 감정 모듈과 기억 장치를 다른 안드로이드 신체에 설치할 수 없다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대뇌와 신체가 본능적으로 그 가능성을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가정이라 한들 그런 문제는 손끝 하나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호비,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는 손으로 호비의 어깨를 누르고는, 호비의 얼굴을 어루만져 자신을 보게 했다. “기계라 해도 마찬가지야. 기계도 죽을 수 있어. 우리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같아.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 너도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떠날 거야. 사랑은 상실을 기다리는 과정이야. 네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알아. 하지만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우리는 무언가를 남겨줄 거야. 그건 죽음을 초월해 영원히 너와 함께할 거야.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 우리가 네게 남겨준 것들을 생각해.”

“그게 뭔데?” 호비가 물었다.

묘묘는 다시금 호비의 가슴과 이마를 손끝으로 눌렀다. “너를 향한 우리의 사랑. 인간의 죽음과 기계의 죽음은 같아. 인간의 사랑과 기계의 사랑 역시 같아. 언제까지나 그 점을 의심하지 마. 알겠어?”

호비는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호비는 그를 올려다보며 ‘묘묘(猫猫)’라 부르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호비의 모습을 보니 묘묘는 다시금 어린 시절의 호비를 보는 듯했다.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상실을 마주하지 않으려 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남기기 전까지 그는 호비를 떠날 수 없었다.

“이건 그저 가정일 뿐이야. 하지만 만일 내가 정말 사라진다면, 내가 했던 말을 생각해.” 묘묘가 말했다. 지나치게 엄숙한 태도가 호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까봐 걱정스러웠기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아주 짧지. 수많은 것을 잊을 수 있어. 만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를 그냥 잊어 버려도 괜찮아.”

호비의 손이 다시금 묘묘의 가슴에 닿았다. 피부는 뜨거웠다. 가슴 속에서 기계 심장이 끊임없이 뛰고 있었다. 모방 시스템이 너무 힘을 쓰고 있는지, 호비에게는 묘묘의 가슴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마저 보이는 듯했다. 그 살아 숨 쉬는 듯한 감각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호비는 황홀한 와중 따스한 냄새를 맡았다. 깊이 잠든 고양이의 배에 얼굴을 묻었을 때 나는 것 같은 냄새. 바디 클렌저의 향긋한 냄새. 따스하면서도 생명력으로 충만한 냄새. 어디서 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맡을 수 있는 냄새라고, 호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는 먹먹하게 묘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6. 아프고도 선명하게 빛나는 프리즘처럼

“준비 다 됐으면,” 묘묘가 눈을 감은 채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말했다. “전원을 꺼 줘.”

“아직 안 됐어.”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 묘묘는 눈을 뜨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여 그를 바라보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예약한 우주선을 놓칠 거야.”

호비는 그의 손을 힘 주어 움켜잡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즉각 반응을 멈추지 않아. 너와 말도 할 수 있어. 그냥 잠드는 거라고 생각해.”

호비는 고개를 숙였다. 움켜잡은 손 아래 묘묘의 피부가 부드럽고도 자연스럽게 주름진 것이 보였다. “그런 말은 어린아이 달랠 때나 하는 거야.”

묘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기다렸다. 호흡 시스템의 작동으로 가슴팍이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자신의 호흡수를 세고 있었다. 89까지 셌을 때야 호비가 그의 손을 힘 주어 잡았다.

“준비된 것 같아.”

묘묘는 눈을 뜨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호비를 주시했다. 호비가 그의 뒤로 손을 뻗어 목덜미 피부 아래 숨겨진 긴급 전원 차단 버튼을 눌렀다. 정상적인 종료 과정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이런 방식으로 그를 끌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명령을 인식한 것은 서브 시스템 전체였다. 몇 초가 지난 뒤 그의 호흡은 멈추고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촉각 전달 시스템 역시 작동을 멈췄다. 호비가 힘을 주어 움켜잡는 바람에 느껴지던 약간의 통증이 사라졌다.

아주 기묘한 감각이었다. 인간으로 살았던 적이 없음에도,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생명이 사라져 간다고 느꼈다. 생명이 있을 수도 있는 존재에서 완전하고 철저한 쇳덩어리로 변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느낀다는 것이 문득 조금 괴로워졌고, 뒤이어 공포가 따라왔다. 몸이 떨릴 것 같았다. 하지만 생체 모방 시스템이 이미 종료되었기에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행동 시스템도 종료되었다. 그는 신체의 제어 권한을 잃었다. 물속을 떠다니는 듯한 감각이었다. 자신이 아주 가볍게 느껴졌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이내 다시 가라앉곤 했다. 그는 안구를 움직여 호비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손은 여전히 꼭 마주 잡은 채였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프지 않아.” 그는 호비에게 말했다. 이제는 말하는 감각마저 다소 생소해졌다. 언어 시스템과 신경 시스템은 아직 작동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입을 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다행이다.” 호비가 말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묘묘의 뺨에 입을 맞췄다. 묘묘의 피부는 말랑말랑하고 싸늘한 고무처럼 변했다. 피부 아래의 모세혈관이 빛깔을 잃어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정말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물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묘묘는 그 감각을 묘사했다. 그는 이제 호비를 바라보지 않았다. 두 눈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흐름에 잠기도록 내버려두었다. 숨을 한 번 내쉬면 강바닥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정말 물에 빠져 죽어가는 듯한 고통이 생겨났다. 위장 장치에서 호흡에의 갈구가 솟구쳐 올라와 가슴과 목구멍을 지나서 마지막으로 입에 도달했다. 그는 익사하는 사람이 마지막 숨을 내뱉듯 입을 벌렸다. 이어서 시스템이 하나씩 작동을 중지했다.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피어나더니 불편감을 일으키는 통증과 함께 가슴에서 폭발하고는 금세 사라졌다.

천장에 프리즘이 나타났다. 어디서 드는지 모를 햇빛이 프리즘을 비춰 온갖 색으로 물들였다. 그 순간 그는 프리즘 속에 있었다. 그는 소리의 색을, 먼지의 색을 보았다. 죽음이 부드러운 광채로 번뜩이며 제 주변을 감싸더니 마지막에는 머리 위 왕관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묘묘는 인간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이 같다면, 호비의 아빠 엄마도, 그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죽기 전에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으리라―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죽음은…… 아름다워.” 묘묘가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벌렸을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물 속으로 다시 돌아왔다. 프리즘과 색채는 모조리 사라지고 세계는 본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곧 흐름의 일부가 될 터였다. 하지만 막 떠나려 할 때 호비가 또다시 그를 붙잡았다.

“한 마디만 더 해줘. 그렇게 빨리 잠들지 마.” 그는 호비의 말에 섞인 울음기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어떻게든 발성 시스템과 입을 조종하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거 알…… 아?”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며 입속에서 흩날렸다. 어조는 우스꽝스럽고도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따스하고 부드럽게 들렸다.
“안드…… 위원회가 감정…… 금지한…… 우리는 감정이…… 거짓말…… 하거든.” 그는 안구를 움직였다. “재미…… 않아?”

“그럼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어?” 호비는 나직하게 물었다. 어째서인지 저도 모르는 사이 제멋대로 눈물이 흘렀다. 그의 눈물은 뜨여 있는 묘묘의 눈으로 떨어졌다가 다시금 묘묘의 눈꼬리로 흘러내렸다.

묘묘의 동공에서 마지막 한 가닥 빛이 사라졌다. 그의 시스템은 모조리 종료되었다. 그는 웃으면서 입을 크게 벌린 채 소파에 기대앉아 조용히 잠이 들었다.

“날 속인 적 있어?” 호비는 그의 싸늘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는 한동안 기다렸다. 익숙한 고통이 나타나는지 보고 싶었다. 몇 분이 지난 뒤에도 호비는 여전히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비로소 묘묘가 죽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호비는 눈물을 깨끗이 닦고, 손가락으로 묘묘의 입천장 스위치를 눌렀다.

 

7. 끝의 감각

웜홀을 건널 때는 내부 방어막이 작동했다. 우주선 내부 조명은 모조리 어두워졌다. 호비는 눈을 깜박였다. 조금 잠이 오는 듯했다. 자동으로 분사되는 마취 가스의 작용 때문일 수도 있었다.

호비는 눈을 감았다. 꿈결로 빠져들기 전까지도 작은 상자를 꽉 움켜쥔 채였다. 상자 안에는 그가 묘묘의 신체에서 분리한 감정 모듈과 기억 저장 장치가 들어 있었다. 그는 작은 아파트 소파에 외롭게 누워 있는 묘묘를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묘묘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들은 한 번도 떨어져 있던 적이 없었다.

웜홀에 진입한 순간 기묘한 압력에 호비는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그는 의자에 꽉 짓눌린 채 생소한 고통 속에서 잠이 들었다. 짧은 꿈속에서 그는 강물 속의 묘묘를 보았다. 머리칼이 엉킨 해초처럼 물결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자그마한 흰색 꽃잎들이 묘묘의 몸과 얼굴로 빙글빙글 돌며 떨어졌다.

그 광경에 그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뭔가가 그의 심장에 아주 큰 구멍을 뚫어 놓은 듯했다. 구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텅 비어 바람이 새어들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묘묘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을 보았다. 그러더니 그 역시 한 장의 꽃잎으로 변해 다른 꽃잎들과 함께 물길을 따라 흘러가며 다시금 자유를 얻었다.

그 뒤로 이어진 꿈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다.

 

8. 영혼 비행

와서 보니 뉴 지구의 풍경은 광고와 똑같았다. 심지어 더 훌륭했다. 햇빛이 아무런 여과 없이 호비에게로 쏟아졌다. 그 뜨거운 온도에 따끔한 아픔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온통 푸르러 화가가 붓끝으로 뽑아낸 가장 완벽한 푸른색 같았다. 너무 밝아서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라 천국에라도 온 것처럼 느껴졌다.

호비는 제자리에 선 채 한동안 햇빛의 온기를 느꼈다. 그는 태양을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찌르는 듯한 빛 속에서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로 보는 수밖에 없었다. 햇빛 아래 서 있으니 진정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햇빛을 묘묘와 함께 누리고 싶었다.

그는 상자를 꽉 움켜쥔 채 통신기에 뜨는 지도 안내를 따라 도착 구역을 떠났다. 몇몇 우주선이 마지막으로 지구에서 도망쳐 온 이들을 연달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우주선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호비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햇빛 아래 서서 새롭게 되살아난 기분을 느꼈다.

호비는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길을 두 번 건넌 뒤 왼쪽으로 꺾어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드디어 길모퉁이에서 목적지를 찾아냈다.

만능 수리. 호비는 고개를 들어 커다랗고 기세 좋은 간판을 바라보고는 자신의 작은 상자를 든 채 들어섰다.

“예약했어요.” 호비는 통신기의 예약 화면을 띄워 안내 안드로이드에게 예약 번호를 보여주었다. “이름은 호비예요.”

안드로이드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고개를 숙여 그의 예약 번호를 스캔했다. 몇 초가 지난 뒤 안드로이드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시스템에서 그 예약 번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요? 다시 검색해 주세요.”

안드로이드는 입을 벌렸으나, 결국은 호비와 말다툼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것은 고개를 숙여 조금 전의 동작을 반복했다. 몇 초가 지난 뒤 안드로이드는 다시금 호비에게 그의 예약 번호는 무효라고 말해주었다.

“새로 예약하시겠습니까? 지금 예약하시면 경험이 풍부한 수리 기사를 바로 파견하여 고객님의 안드로이드를 점검해 드립니다. 기본적 유지 보수는 대기하실 필요가 없고, 부품 교체 및 기타 수리의 경우 상황에 따라 3~5일 가량 소요될 수 있습니다.”

호비는 내심의 불안을 억누르고, 안드로이드에게 자신의 이름과 수리 사항을 말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수리받을 안드로이드 모델을 말하는 단계에서 막히고 말았다.

“C5형 안드로이드는 금지 모델입니다. 저희 회사 및 어떤 안드로이드 수리 회사에서도 해당 모델 안드로이드의 수리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전광석화처럼, 호비는 일이 어디서 꼬였던 것인지 문득 깨달았다. 모든 것을 알아차린 그는, 그러나 여전히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채 그 안드로이드에게 물었다.

“안드로이드 윤리 도덕 위원회에서 그 금지법, 안드로이드는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법을 없애지 않았나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고객님.”

그것은 호비의 마지막 환상을 명쾌하게 깨부숴 버렸다. 그의 손에 들린 상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졌다. 몇 분 전까지 호비는 그 상자가 묵직하다고 생각했다. 안에는 묘묘의 생명과 그들의 미래가 들어 있었다. 이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호비는 의미 없는 최후의 몸부림을 쳤다. “여기 인터넷 광고랑 상담 전화에서 저한테 그 금지법은 없어졌다고 했는데요.”

“고객님이 보신 웹 페이지와 상담 전화번호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호비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두를 그것에게 보여주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왔던 광고 페이지, 몇 번이나 건 끝에 연결된 상담 전화, 그리고 소위 ‘고객센터’에서 그에게 보내 준 금지법이 없어졌다는 뉴스, 그 밖에 한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다른 증거들까지. 모조리 눈앞의 안드로이드에게 내밀었다.

그것이 고개를 숙여 살펴보는 동안, 호비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안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안드로이드가 모든 증거를 본 후 자신의 착오였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금지법은 정말로 없어졌다고. 그의 묘묘는 새로운 안드로이드 신체로 부활할 수 있다고. 그것이 그렇게 말해주기를 너무나도 바랐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해당 웹 페이지와 전화번호는 저희 공식 광고도 상담 센터도 아닙니다. 나머지 뉴스 역시 가짜입니다. 혹시 사기를 당하셨다면 경찰에 신고해 드릴까요?” 성별을 판단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가 기계 팔을 뻗어 호비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어눌한 위로인 듯했다.

호비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C5의 감정 모듈을 평범한 안드로이드 신체에 부착하면 감정이 생길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고객님. C5형 안드로이드의 핵심 프로세서는 감정 락 시스템을 회피합니다. C5의 감정 모듈은 다른 어느 안드로이드 시스템과도 병존할 수 없습니다. 정상 작동이 불가능합니다.”

호비는 그 안드로이드를 한참 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안드로이드는 감정이 생기면 거짓말을 하거든.” 그는 묘묘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재미있지 않아?”

“고객님, 인간 직원의 서비스가 필요하십니까? 고객님에게서 강렬한 감정적 파동이 측정되었습니다. 저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고객님께 알맞은 서비스를 제공해 드릴 수 없습니다.”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자그마한 상자를 갖고 수리센터를 빠져나왔다. 그 별것 아닌 작은 상자에 그의 끝없는 사랑과 고통이 담겨 있었다.

예약해 두었던 중개 안드로이드가 와서 새 거처로 그를 데려가려면 몇 시간이 남았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호비는 낯선 길거리를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집은 지구에, 머나먼 웜홀 저 너머에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의 일평생이 다 가도록 사라지지 않을 순간이었다. 그는 또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그는 이 세상과 아무 얽힌 것이 없었다. 온몸이 허무감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호비는 자신이 이렇게나 강렬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모든 것이 아주 멀리 떠나 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무엇도 그를 붙들어 둘 수 없었다. 지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면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갈 듯했다.

호비는 자신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홀로 남겨졌다고, 버려졌다고, 우롱당했다고. 하지만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분명 이렇게 따스한 냄새, 사랑받는 냄새가 나는데.

그는 휘청이며 아무 목적도 없이 걸었다. 왜 묘묘가 눈앞에서 죽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QT 가정용 돌봄 안드로이드에는 긴급 전원 차단 보호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었다. 강제로 전원이 꺼지면 보호 시스템이 남은 에너지를 사용해 최저 절전 모드로 작동을 유지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전원이 종료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휴면 상태가 된 것뿐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강제 전원 차단으로 입는 손상을 최저 수준으로 낮출 수 있었다. 휴면 상태는 적어도 5시간 동안 유지된다. 누군가 그들의 전원을 다시 켜 줄 때까지, 혹은 잔여 에너지가 모두 소모되어 완전히 전원이 꺼질 때까지. 그 점에서만은 묘묘는 그를 속이지 않았다. 호비가 본 그의 죽음은 그저 잠든 것에 불과했다. 묘묘의 진짜 죽음은 5시간 뒤까지 기다려야 했다.

호비는 고개를 숙여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다 문득 묘묘의 끝을 느꼈다. 그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옆 건물벽에 기댔다. 몸 안팎에서 한 가닥 싸늘한 기운이 천천히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힘이 모조리 뽑혀 나갔다. 그러나 몸은 아주 가볍디가볍게 변했다. 물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빛이 오색 빛깔로 반짝이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다시금 어둠으로 돌아갔다. 그만이 여전히 떠다니고 있었다. 문득 마음이 놓였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어서 몸의 대부분이 다시금 중력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주 작은 부분만은 계속 위로 떠올랐다. 저 높은 하늘로, 더 높이, 더 멀리, 그러다 마지막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호비는 자신이 또 조금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혼의 일부가 그의 몸을 떠났다. 그 자신조차 미처 대비하지 못했건만, 영혼은 벌써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영혼은 어디로 날아가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우주선의 궤적을 따라 온 길대로 돌아갈 것이다. 호비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불타는 천체와 뭇별의 파편을 지나 줄곧 돌아가서, 그들이 살았던 작은 구축 아파트로 갈 것이다. 아파트 1층에는 아직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남겨 놓은 알아볼 수 없는 낙서가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하던 놀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호비는 벌써 잊어 버렸다.

우주선이 웜홀을 건너 뉴 지구까지 오는 데에는 4시간 36분이 걸렸다. 영혼의 일부는 웜홀을 건널 수 없으니 기나긴 새 길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영혼은 호비의 남은 시간 모두를 다 쓴 끝에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든 그의 영혼은 반드시 묘묘를 찾아갈 테니까. 그렇게 귀착을 찾고 난 뒤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묘묘의 곁에서 우주의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영혼은 계속 날아갈 것이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용기와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사랑을 품고 계속해서, 묘묘를 향해 줄곧 날아갈 것이다.








저자 후기 :

이야기 배경과 안드로이드 신체 구조 설정 일부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A.I.》에서 빌렸습니다.

러시안룰렛 편의 아무 상관도 없는 IF 루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줄곧 호비를 위해 희생하는 묘묘가 보고 싶었어요.
원래는 정식 작별 인사를 시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편이 좀 더 짜릿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결국은 그리 모질게 굴지 못했네요. 어쩔 수 없죠.